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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 Jun 29. 2021

구슬 왕자 4

소녀


기연은 책상 앞에서 눈을 떴다. 뜨거운 햇살이 쌓인 책들 위로 내리쬐 있었시 조용했던 매미들의 울음 소리 멀리서 들려왔다. 롱한 상태로 간을 확인한 그녀는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도서관 건물을 빠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모니터를 켤 때, 그녀는 시큰거리는 통증에 놀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시 박힌 손가락과 끝이 부러진 손톱. 모든 게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연은 안도감과 불안감 사이서 오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후로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 어김없이 영롱한 구슬이 놓여있었다. 아무런 기척 없이 눈앞에 덩그러니 서있는 그 구슬들은 딘가 비현실적이었다. 경사 위에 놓여있는데 굴러내려가지 않거나, 계단 아래에 있던 것이 어느 틈에 올라와 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것들은 조용하면서도 끈질기게 기연의 시선이 닿는 곳에 느닷없이 나타나고는 했다.


그중에서도 기연의 뇌리에 깊이 남은 것은 야유회에서의 일이었다. 일곱 시면 해가 가라앉고 붉은 노을이 퍼지기 시작하는 여름의 끝자락. 기연과 팀원들은 매년 그래왔듯 회포를 풀기 위해 바다로 향했다. 투명한 바닷물의 가장자리 하얀 포말이, 그 바깥으로 섬세한 다갈색 모래들이, 더 바깥으로는 검푸른 소나무들이 장식하고 있었다. 변함없는 해변의 풍광에 만족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에 몸을 내맡겼다. 물에 뛰어들어 첨벙대는 동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해변가를 산책하던 기연은 소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 앞에서 몇 마리 갈매기들이 뒷짐을 진 채 무의미하게 모래를 쪼있었. 참 열중한 듯 보였던 새 한 마리가 작을 멈추고 기연 왼편을 가만 바라보았다.


거기엔 길을 잃은 작은 별이 놓여 있었다. 처음엔 진주라도 발견한 줄 알았지만 가만 보니 반쯤 투명한 예의 구슬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것처럼 근처 모래 위에는 그것이 굴러온 자국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나무 껍질들이 그녀의 발치 떨어져 내렸다. 올려다보자 나무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까마귀들이 보였다.


“너희 꺼니?”


아무래도 저  구슬과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이야, 하고 기연은 생각했다. 에게 돌려줄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슬에 다가섰을 때, 기연은 문득  이 기이한 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을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구슬로 엮인 우연의 고리가 완성될 무렵에서야 비로소 동그란 구체의 욕망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 우만난 적이 있지…."


발짝 더 다가가 들여다본 구슬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울부짖지도, 매력적인 소용돌이를 품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바닷가를 맴돌던 갈매기 무리를 까마귀 떼가 덮치며 해변에서 한바탕 소이 벌어졌다. 피서객들은 놀라 그 자연의 혈투를 바라보았고 몇몇은 셔터를 터뜨렸다. 기연도 요란한 소리가 나는 쪽을 시선을 돌렸다. 검은 새의 무리는 처음부터 싸울 의지가 없었는지 갈매기들에게 건성으로 시비를 걸어놓고는 금세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다시 발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구슬은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나처럼 흔적도 없이…. 리고 그날부로 기연은 원인 모를 허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기운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봐도 소용없었다. 기연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괴로운 허기를 느꼈다. 몸 피곤한데도 잠 허락되지 않는 밤이 시작되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식욕 일지 않았고, 억지로 입에 쑤셔 넣자면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기연은 자신의 상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었다.


어느 날 무심결에 냉장고 문을 연 기연은 마침내 허기를 달랠 만한 것을 찾아냈다. 생김이 동그랗고 혀로 굴릴 수 있는 것. 씹으면 즙이 터져 나오는 것. 그와 비슷한 것…. 기연은 물을 채운 냄비를 인덕션에 올리고 방금 발견한 달걀들을 던지듯 집어넣었다. 그녀의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있었다. 껍질에 금이 갔는지 흰자가 세어 나와 하얀 실선을 그리며 냄비 안을 휘감았다.  기분 나쁜 형체를 걷어내기 위해 국자를 들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이렇게 웅얼거렸다.


설탕을 두 숟갈 넣어.


누구야…. 누가 말하는 거야?


계피는 아주 약간.


기연은 음성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국자를 내려놓고 머리와 돌리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꼼짝하지 않았. 오직 냄비 속을 휘젓는 손만이 더 빠르게 더 세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찐득찐득해질 때까지 섞어주는 거야….


이 문장을 끝으로 괴이한 독백에서 해방된 기연은 튕겨지듯 인덕션에서 떨어져 나와 국자를 냅다 벽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냄비 속 내용물들을 개수대에 붓고 허겁지겁 분쇄기를 돌렸다. 하얀 살점과 껍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얼굴 여기저기에 생채기를 냈다.


욕실로 들어가 찬 물로 세수를 했다. 상처 난 눈가와 볼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기연은 목 뒤를 적시다가 내친김에 머리까지 모두 담가버렸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새카만 두상이 떠올랐다. 머리칼을 거두고 또 거두어도 자신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눈과 입이 만져져야 할 자리에 날카로운 물체가 만져졌다. 기연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천천히 얼굴을 렸다. 온통 검은 머리에는 커다랗고 길쭉한 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기연은 부들거리는 팔로 세면대를 붙들고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이성의 끈을 놓았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또 꿈을 꾸고 있어, 나는.”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찬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부리가 사라지고 수오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랫동안 보지 못해 그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싫었다. 진한 그리움과 증오가 몸 안에서 뒤섞이는 듯했다. 치미는 감정으로 속이 메슥꺼워진 기연은 변기 위로 몸을 기울였다. 텅 빈 위장에서 이물감이 솟구치더니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식도에서부터 구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기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깨어났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어깨가 들썩였다. 음침한 꿈보다는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무서웠다. 빗방울이 거칠게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오가, 수오의 얼굴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까마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나의 실수였다. 끝을 내고자 했던 마음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나는 다만 그림과 우리 사이의 지난한 싸움을 매듭짓고 싶었다. 우리의 영혼과 체력을 갉아먹는 구슬 왕자의 존재가, 생명의 고리로 엮은 편직물을 좀먹는 그 어두운 존재가 세대에서 사라져 버리길 바랐다. 나는 오랜 시간 그의 망토가 기연의 주변을 기웃대는 걸 인내해왔다. 그의 역겨운 숨결이 주변에 일렁일 때면 기연은 영문도 모른 채 괴로워해야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낀 나는 그림의 전신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그림을 지키지 않던 어느 날 밤, 제는 익숙해진 사람의 외피를 입 전시관 발을 들였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모든 건 쉽게 끝났다. 그림은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채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고, 나는 라이터를 켜서 모퉁이에서부터 그림이 불에 타도록 내버려 두었다. 불은 벽을 타고 번갔다. 갑갑할 만큼 더디던 번짐은 조금씩 속도를 끼워가더니 이내 전시관 한 층 화염으로 삼켜버렸다. 사람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나는 쉬지 않고 근처를 배회하며 인적을 살폈다. 그날 새벽 나는 어느 때보다 떨리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아침의 해떠오르길 기다렸다. 기연이 자신을 괴롭혀온 그림자로부터 해방되어 평안을 누리게 될 거라는 희망에 사로잡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명이 밝을 때까지 코 끝에 감돌던 매캐한 연기 냄새 지금도 또렷이 기억다.


그러나 내가 불태운 것이 구슬 왕자를 붙잡아 두던 족쇄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해방된 것이 기연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더욱 자유롭게, 더 먼 곳까지, 이제는 우리가 좇을 수 없는 속도로 떠돌아다니며 희생양을 찾으러 다녔다.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생명, 심지어 길가의 돌마저 나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정처 없이 수많은 계곡과 노목들 사이를 전전하며 도망 다녔다. 누구도 나를 쫓지 않았지만 동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기연의 얼굴을 볼 자격은 더욱 없다고 여긴 채 그녀의 곁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회피했다.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숭고한 신념이 나의 오만으로 무너져 버렸다. 지난 수백 년간 조상들이 지켜온 구슬 왕자의 감옥 살을 내가 없애버린 것이다! 그림 속의 왕자는 영원한 자유를 얻었고, 나는 치욕의 사슬에 영영 매이고 말았다. 무언가의 끝을 맺을 수 있는 권한이 게 있었다고 착각한 죄. 명의 씨실 날실의 직조를 감히 이 보잘것없는 날개로 건드린 죄. 그 죗값을 나는 평생에 걸 치러야만 했다.


도피에 지친 어느 . 나는 조상들의 기억을 두드려 그림 속 구슬 왕자와 조우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잃을 것이 없는 새 만이 감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위험한 일이야.


나의 누이가 말했다.


누구도 그 소년을 직접 만나려 한 적은 없어.


동료들 역시 여러 언어로 나를 만류했다. 때로는 날카로운 공격으로. 때로는 부드러운 회유로.


해야만 해.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끝없이 외쳤다. 만회할 기회를 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우리가 그 저주받은 그림과의 싸움을 우리의 뼈나 살처럼 굳어지도록 방치해온 것은 아닌가, 떼어버리기를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내가 이처럼 굳은 의지를 보이자 만류하던 동료들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중 몇이 나를 도와 그림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도록 힘을 써주었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산맥과 광야, 바다와 크고 작은 호수들을 거슬러 마침내 저주받은 그림 속의 소년과 조우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이 죽어가던 순간에 그의 곁에 있던 검은 새의 기억에 도달한 것이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근엄하고 신성한 대까마귀의 목소리가 마지막 관문으로 나를 막아섰다. 나는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시간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겹겹의 막들이 걷히 눈을 붕대로 감은 소년이 사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찬장 더듬는 장면이 펼쳐졌다. 소년은 무언가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가 떨어질까 조마조마한 대까마귀의 심정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중심을 잃은 소년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순간이었다. 여러 차례의 수술로 조금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던 소년은 이 작은 충격에 의식을 잃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소리 없이 뛰던 맥박이 잦아들었다. 검은 새는 아이가 곧 죽을 것을 직감하고, 미루나무에서 내려와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갔다.


보고 있어?


기척을 느낀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


나이 든 까마귀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한다.


추워….


그렇게 말한 아이는 갑자기 입이 귀에 걸려 웃기 시작한다.


설탕을 두 숟갈 넣어.


아이는 그렇게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배가 고팠는데 아버지는 자꾸 눈을 고쳐주려고 했어. 이미 다 볼 수 있었는데. 눈 같은 건 필요 없었는데…. 계피는 아주 약간.


그의 의식이 서로 다른 두 장소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듯했다.


모리치씨는 내가 추울까 봐 옷을 지어줬지. 웃기지 않아? 구슬은 하나도 따듯하지 않잖아….


이제 아이는 뼈만 남은 팔을 허공에 휘휘 젓는다.


그러다가 찐득찐득해질 때까지 섞어주는 거야….


까르르 웃던 소년마른기침을 몇 번 내뱉은 다음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연기 혹은 메아리처럼 공중에 남아 떠돌았다.


엄마는 항상 찬장 위에 설탕으로 만든 사탕을 올려두셨지. 아버지는 밤마다…. 나는 그걸….


소리가 멀어져 갔다. 장면의 주변으로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현기증을 느낀 나는 그 장면에서 잠시 물러기로 한다. 어두운 기운에 휩싸여 고립되기 전에 빠져나와야 했다. 그러나 비상하려고 뻗은 날갯죽지를 죽은 소년이 덥석 잡아채는 바람에 시간의 문턱에 걸리고 말았다. 그 문턱은 공교롭게도 어린 기연이 처음으로 구슬 왕자를 만난 날의 장면이었다. 액자 안에 갇힌 나를 기연은 보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소년의 차갑고 기분 나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자 시간은 조금 더 흘러서 액자를 태우기 위해 다가오는 나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날의 내가 담담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액자 귀퉁이에 불을 붙이고 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살을 태울 듯한 뜨거운 열기에 나는 다시 한번 몸부림쳤다. 그러는 사이 감옥에서 해방된 소년은 유유히 빠져나가 기연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나는 아이를 잡아 세우려 지만 투명한 유리에 부딪쳐 나아갈 수 없었다.


성조(成鳥)가 된 이후 처음으로 나는 어린 새처럼 울며 잠에서 깨어났다. 기진맥진한 몸이 기울며 아찔한 낭떠러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발밑의 가지를 가까스로 붙들고 중심을 잡았다. 빗물인 줄 알았던 작은 눈물방울들은 나의 부리 끝으로 한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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