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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는 안개 낀 날을 싫어해 본 적이 없다. 커피 향이 깊어지고,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명도가 서로 뒤엉키는 그런 날을 오히려 좋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안개가 낀 날이면 커피나 뿌연 도시의 풍경보다 어느 택시기사의 메일과 붉은 벽돌 건물이 먼저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그 피아노 선율….
구청의 웹사이트를 관리하는 사무직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게시판에 올라온 문의 사항들을 처리하고 답변을 달아주는 것이 나의 주 업무였다. 지역의 역사와 지리, 문화행사 소개, 심지어 공중화장실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응대하는 것도 전부 내 몫이었다.
호우 탓에 교통이 정체되어 퇴근이 늦어진 어느 겨울날. 자정이 넘어서 올라온 문의글 하나를 나는 그저 가볍게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게시물을 클릭한 순간 속절없이 마지막 한 줄까지 전부 읽고 말았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그 기묘한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조차 붉은 유니온 클럽 저택의 최면 같은 것은 아니었나 이따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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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번호: 1407
게시일: 2019/11/20, 01:34
작성자: 임승택
첨부파일: 지도.jpg
저는 퇴직을 앞둔 택시기사입니다. 실은 이 게시판에 이런 질문을 올려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관할 부서가 다르면 알아서 전달해 주실 거라 믿고 올려봅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정동 8-12번지의 어느 건물에 대해 문의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 지도에서 그 주소지를 살펴봤는데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분명 승객 한 명을 그곳에 내려 주었고, 거기엔 크고 오래된 건물도 한 채 있었습니다. 건물 안에는 심지어 많은 사람이 있었지요. 실은 그것이 사람이라고 주장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만…. 무슨 소리인가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부디 정신 나간 사람의 이야기로 여기지 마시고 차분히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보통 서울역에서 첫 손님을 받습니다. 그다음은 목적지를 따라서 수도권을 돌거나, 손님을 찾지 못하면 다시 시청이나 서울역으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 일대는 나름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남아있는 옛 건축물들 덕택이겠지요.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뒤편에 있는 기사식당은 저의 단골집인데, 식사 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선로를 내려다보는 것이 하루의 큰 낙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걸 소확행이라 부른다지요.
어제는 비가 참 많이 내리기도 했고, 긴장한 상태로 제법 먼 거리를 왕래하여 무척 피곤했습니다. 역 앞 택시 정거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중, 몸이 노곤해져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처구니없게도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습니다. 9시쯤 잠이 들었으니 꼬박 세 시간을 날려버린 것입니다. 황당하여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처음엔 강한 빗줄기 소리인가 싶었지만 두드리는 소리는 조금씩 뚜렷해졌습니다.
똑똑똑.
나는 일을 오래 하며 몇 가지 하찮은 노하우를 쌓아 왔는데, 그중 하나는 노크로 손님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가령 조금 전의 노크는 마른 손가락에서 나는 소리로, 삼사십 대가량의 여성 손님이 탑승할 것이라는 게 저의 예상이었습니다. 타라는 손짓을 하자 손님은 뒷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노하우가 무색하리만치 그가 여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늠할 수가 없더군요. 마치 그녀의 주변을 어두운 장막이 둘러치고 있는 듯했지요. 나는 그것을 역광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탑승할 때부터가 이상했습니다. 사람이 좌석에 앉으면 아무리 몸이 가벼워도 차에서 반동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목적지를 들으려고 승객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예의 어두운 장막이 조금 걷혀 그 인상을 잠시나마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빛이 닿는 면이 비단처럼 반짝거리는 벨벳 소재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스타일이 예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옷은 비에 젖은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새 비가 그쳤나?’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여전히 비는 무섭게 퍼붓고 있었지요. 내 손님은 또한 흑갈색 머리칼에 아주 옅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옅은 동공을 나는 처음 보았습니다. 졸다가 깨어나 인지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해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강해져만 갔습니다.
“정동 8-12번지로 가주세요.”
‘정동 8-12번지….’ 속으로 주소를 되뇌었습니다. 내가 아는 한 8-11이 그 구획의 마지막 번지수였습니다. 역시나 내비게이션에서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길이라는 게 자주 바뀌는 데다, 내비게이션이 신문물이라 해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으면 종이지도와 다를 바 없으니 일단 가보기로 했습니다. 8-11번지를 지나서도 길이 보이지 않으면 손님에게 물어가며 찾자는 생각으로 말이지요.
우리 운전사들은 남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욱 다양한 손님을 태웁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람이 아닌 손님을 태웠다는 동료들의 이야기도 허다합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의 이야기를 귀띔으로 넘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날은 그들의 말투며 목소리의 떨림까지 어찌나 선명히 기억이 나던지 무의식이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이 아닌 그 손님들은 주로 산골이나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 많이 마주치지요. 귀신인가 아닌가 확인해보려고 부러 요즘 뉴스로 말문을 트는 동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선지는 물어도 왜 그리로 가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시간에 이상한 곳으로 가 주길 요구하면 아무래도 그 목적이 궁금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차에 기름이 없다거나, 길을 못 찾는 시늉을 하는 거지요. 저는 이 방법을 써서 몰래 죽으려던 사람을 구한 적도 있습니다. 혹시 압니까? 우리가 범죄를 막은 적도 몇 번 있을지 말입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샜습니다만, 웬 민둥산으로 가 달라는 손님을 태웠던 동료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목적지가 특이한 손님의 얼굴을 한 번 즈음은 봐 두는 습관을 지녔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질 때를 대비해서지요. 그날도 아마 그런 의도에서 거울을 들여다봤을 겁니다. 건물 한 채 없는 황량한 곳에 내려 달라고 부탁한 손님의 얼굴을 보아 두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울에 눈길을 던진 내 친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요. 오로지 텅 빈 뒷좌석뿐…. 손님의 덩치가 작지도 않았고 몸을 숙이는 기척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휑뎅그렁한 들판에 손님을 내려주고 찝찝한 기분으로 돌아서 나오는데, 방금 내려준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사방 삼백 미터 안으로 몸을 숨길만 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방금 차에서 내렸다면 시야에 잡혀야 정상이었습니다. 질겁한 내 친구는 택시에서 내려 한참을 둘러보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모래, 진흙, 건축 부자재 따위가 전부였다는 겁니다.
그 일화를 떠올린 나는 LED 간판과 조명으로 가득한 길목을 지날 때 거울로 흘깃 뒷좌석을 보았습니다. 그 눈부신 인공조명이 손님의 정체를 드러내 주길 바라면서요. 그러나 이내 속에서 욕지거리가 나왔습니다. 그녀의 와인 색 벨벳 드레스만이라도 반짝거려 주었더라면! 그러나 거울에 비친 것은 오로지 뒷좌석의 낡은 가죽시트뿐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 눈을 의심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질문하는 척하며 뒤를 몇 차례 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창밖을 내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여인이 앉아 있더란 말입니다. 어디로도 증발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등과 목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백 년도 더 되어 보이는 커다란 가로수를 지나칠 즈음 길의 양쪽에서부터 안개가 자욱이 차오르며 한기가 더해졌습니다. 손님의 콧노래는 덩달아 고조되어 갔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나는지 중간중간 혼자 웃음을 웃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소름이 끼쳐 차를 세우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습니다.
8-11번지의 극장 건물에 이르러서는 속도를 조금씩 줄였습니다. 웃고 있는 가면들이 인쇄된 창작극 포스터를 보고 있자니 괜히 더 으스스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사이 안개는 더욱더 짙어져 5미터 앞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나는 열심히 두리번거리다 겨우 얘기를 꺼냈습니다.
“손님, 죄송한데 8-12번지는 보이지가 않네요.”
여자의 콧노래가 뚝 멈추었습니다. 그 짧은 정적은 고작 몇 초쯤 되었을 테지만 내게는 억겁의 시간과 같았습니다. 잠시 후 망사 장갑을 낀 창백한 손이 내 옆으로 쓱 올라오더니 저 앞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거리를 가득 메우던 안개가 갈라지며 생전 처음 보는 길이 나타난 겁니다! 나는 입안이 바짝 말라 침을 만들어서 삼키고는 액셀을 천천히 밟으며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텅 빈 길목을 따라 30미터쯤 들어가니 왼쪽의 담 너머로 노란 광원이 보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커다란 건물이 벽 너머에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어림잡아 이백 평은 됨직한 건물에서 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잔돈은 됐어요.”
그녀가 짤랑거리는 무언가를 건네주었지만 감히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내 동료와 막 같은 일을 겪게 될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을 가로질러 걷고 있어야 할 그녀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라이트를 훤히 켜 두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녀는 야속하게도 뒷문을 반쯤 열어둔 채 내렸습니다. 나는 -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 뒷좌석의 문을 닫기 위해 차에서 내려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거리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풀 한 포기, 고양이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그 길목에서 소리가… 수십 명의 사람이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발소리라는 것이 주로는 구두 굽 소리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신지 않는 그런 구두 말입니다.
나는 그 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몬드 색 가죽 구두에서 나던 소리를 어려서부터 무척 좋아했지요.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의 구두를 윤이 나도록 반들반들하게 닦고서, 비슷한 색깔의 서류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면 어린 나는 격자무늬 창가로 달려가 차가운 유리에 귀를 댄 채 돌계단을 내려가는 그 경쾌하고도 무게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말입니다. 나는 그 소리를 거의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의 구두를 신어볼 기회가 오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런 구두를 신은 보이지 않는 수십 명의 신사가 거리의 끝으로 행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들떠 있는 듯했습니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이 웃고 떠들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소리의 흐름으로 내가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들 중 한 명과 부딪치거나 느닷없이 머리가 나타나 눈이 마주칠까 바닥만 보면서 느릿느릿 움직였습니다. 뒷문을 조용히 닫은 나는 황급히 운전석에 도로 앉았습니다. 모든 문이 닫혔는데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안까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한동안 잠자코 있었습니다. 도무지 옴짝달싹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몹시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십여 분쯤 지나자 발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모두가 8-12번지의 건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을 환영하는 희미한 재즈 선율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면 피아노깨나 쳐본 누군가가 제 흥을 억누르지 못해 즉석 연주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중간에 첼로인지 뭔지 현악기 소리도 섞인 것 같았는데 워낙 문외한인지라…. 첫 곡이 끝나자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조금 전 그 곡은 내가 아는 노래 같기도 하고 모르는 노래 같기도 했습니다. 흥겨운 음악이 지닌 마력 탓인지 조금 용감해진 나는 차에서 내려 과감하게 그 건물의 입구로 다가섰습니다. 장미 줄기 문양의 철창살 너머로 웅장한 벽돌 건물이 황금빛을 내뿜으며 서 있었습니다. 여러 실루엣이 그 안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2층의 복도는 아치형으로 개방이 되어 있었는데, 잔을 들고 오가는 커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가 조금 전 태웠던 여자 손님이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그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 것도 같습니다.
어느새 두 번째 연주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넋이 나가 음악을 감상하고 있을 때, 나의 택시로 다가서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다시 이상한 손님을 태우기는 싫었기 때문에 황급히 차로 돌아가서 운전대를 잡고 거리를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진짜 사람이 많은 거리, 진짜 소음과 진짜 빛으로 가득한 시청의 대로로 서둘러 빠져나왔습니다. 비는 그치고 안개 역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 몸은 온종일 밖에 서 있던 사람처럼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땀에 범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새벽녘에 집에 도착하여 뜨끈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갔습니다. 피어오르는 김이 안개를 떠오르게 하여 좀처럼 편안히 목욕을 즐길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몸을 허겁지겁 말린 뒤, 정신이 온전한가를 확인해보려고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시시껄렁한 주제로 수다를 떨어 보기도 하고, 자극적인 뉴스를 찾아서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밤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점토가 마를 때 그러하듯 내 안에서 더 굳게 각인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저택의 위치와 대강의 모양새, 그리고 그 건물을 둘러친 검은 벽 등을 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엑스 표시는 제가 택시를 세워 두었던 곳입니다. 저는 그 건물이 확실히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8-12번지가 정식으로 등록된 부지인지, 그 건물은 대체 뭐 하는 건물인지…. 늦어도 놓으니 꼭 한 번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승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