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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번호 1407에 대한 답변
게시일: 2019/11/23, 16:10
안녕하세요, 임승택 님.
첨부파일에 표시해두신 장소를 알아본 결과
택지개발사업이 예정된 구역으로
현재로선 건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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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는 좀 더 빨리 답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먼저 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신중하게 알아본 후 답을 하고 싶었다. 빨리 쳐낼 수 있는 일들을 먼저 처리하고 나니 하루 하고도 반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정동 8-12 번지’라는 주소는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마침내 조사에 착수했을 때는 그 문의글을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국토부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구청 지도에서 주소지를 우선 확인해보았다. 업데이트 날짜는 불과 5일 전. 임승택 씨가 언급한 날에서 하루 전의 지도였지만 그 사이에 건물이 솟아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의 말 대로 번지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서 나는 근방의 부지 개발 기록을 열람했다. 그것들은 10년 단위로 묶여 있었는데, 임승택 씨가 표시해 둔 위치는 다섯 개의 장부를 넘기도록 개발제한구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제한은 내년이면 풀릴 참이었다. 참고 삼을 생각에 식생 지도까지 들춰보았지만 그 위에는 ‘트인 땅’이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나는 얼마나 오래된 기록까지 들춰봐야 하는 걸까 슬슬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딱 열 번째까지만 열람해보는 거다’ 하고 여섯 번째 장부를 펼쳤을 때, 같은 자리에 그려진 작은 사각형 기호를 발견했다. 축적을 보니 정말로 이백 평 남짓 되는 건물이었다.
“유.니.온.클.럽.”
건물 밑에 찍힌 흐릿한 글자를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8-12번지의 유니온 클럽이 바로 임승택 씨가 문의한 문제의 저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던 건 다음 서술 덕분이었다. ‘아치형 테라스.’ 이름을 입력했을 때 조회되는 무수한 흑백 사진 중에서 둥근 테라스를 가진 건물들을 추린 다음, 두어 장의 후보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찬찬히 살피던 중에 나는 오싹한 기분을 맛보았다.
동서양의 양식이 뒤섞인 듯한 저택 주변으로 테니스 라켓이나 악기, 스케이트화 등을 들고서 미소 짓고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2층 테라스에 외따로 나른한 듯 기대어 선 여인…. 털로 된 숄에 거의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벨벳 드레스는 겨울의 태양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흑백 사진이었지만 그 드레스의 색깔을 알 것만 같았다….
책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길 여러 번.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개인 계정의 메일함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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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 제목: 임승택 씨에게
발신일: 2019/11/24, 23:56
발신자: 정인호
안녕하세요. 구청 문의 게시판에 답변을 드렸던 담당자입니다. 공식적으로 드린 답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드리고자 메일을 드렸습니다. 솔직히 임승택 씨의 글이 조금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는 걸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허구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묘사가 너무도 구체적이어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더 해 보았습니다.
그 건물은 존재했습니다. 다만 반세기 전에 말입니다…. 임승택 씨도 이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계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확인이 필요하셨던 거지요.
택지로 바뀌기 전 그곳은 수년간 빈터였습니다. 조금 더 이전의 자료를 조회해 보니 ‘유니온 클럽’ 소유의 건물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당시 외교적인 문제로 한국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 또는 스포츠클럽을 위한 공간이었던 겁니다. 저보다 연배가 있으시니, 들어본 적이 있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자료실에서 건물의 사진도 몇 장 발견했습니다. 파일로 첨부해 드렸으니 목격하신 저택이 맞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실은 이 메일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임승택 씨를 더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먼 친척 중 한 사람도 고궁을 지키는 경비 일을 하다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오래전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가끔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겁니다. 동료분들의 얘기도 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신비로운 잔상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시거나, 본인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끼시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동안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들었습니다. 기온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눈으로 바뀔지도 모르겠군요. 운전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에겐 고된 계절이겠지요. 모쪼록 사고 없이, 따듯한 겨울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정인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