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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가 임승택 씨의 마지막 메일을 열어 본 건 뉴스에서 어느 택시기사의 실종 소식이 보도된 이후의 일이었다. ‘정동 8-12번지’라는 주소를 부여받은 신축건물 뒷마당에서 낡은 택시 한 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화면에 잡힌 택시는 마치 수십 년간 땅 속에 묻혀있던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막 실종된 기사의 이름을 언급하려 할 때 나는 TV의 전원을 껐다.
몇 개월이 지나, 사라진 택시기사와 닮은 사람을 목격했다는 동료 기사들의 제보가 이어졌다. 장소는 모두 그 거리 주변이었다. 진술은 유사했다. 그들의 사라진 동료가 태연스럽게 어느 여인과 팔짱을 낀 채로 골목 저편으로 멀어져 가더라고. 여인은 가로등을 지나갈 때마다 면이 반짝거리는 와인 색 드레스를 입고 있더라고. 아무리 이름을 불러봐도 그들의 친구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더라고.
웃음이 났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 동료라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는 유니온 클럽에서 들려오는 재즈와 노란 백열등의 섬광, 따듯한 디저트에서 풍겨오는 계피향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을 테고, 그 세계에서는 그의 이름도 더는 같지 않을게 뻔하지 않은가.
나는 연말이나 특별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 거리를 자주 찾았지만, 안개가 낀 겨울날 저녁에는 의식적으로 다른 길을 선택해 돌아갔다. 오래된 습관을 고수해오던 내가 낯선 곳으로 약속 장소를 옮기자 친구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나는 조금 지겨워졌을 뿐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예보에도 없던 소나기가 쏟아진 지난여름. 시청에서 서대문으로 난 그 지름길을 별생각 없이 가로질렀다. 여름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방심했던 것이다. 안경이 빗방울에 뒤덮이고 시야가 온통 흐려져 그날 본 것 무엇 하나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았다고 믿는다.
어디선가 나이 든 남자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녹음파일 앞에 짧게 담겼던 임승택 씨의 목소리와 꼭 같았다. 이어서 갈색의 가죽 구두가 돌바닥에 닿을 때면 생기는 마찰음도 들려왔다. 그가 마침내 그의 아버지가 신던 구두를 신고서 이 거리를 누비고 있는 건지 모른다고, 나는 왠지 모르게 감격에 잠겨 생각했다. 순간 뒤통수를 빛이 어루만지는 기분이 들어 천천히 돌아보았다. 노랗고 따듯한 광원이 만들어낸 둥근 아치가 저 멀리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선율…. 그건 우리가 들었던 바로 그 음악이었다! 갑자기 한기를 느낀 나는 그 아련한 광경을 조금 더 살필 여유를 잃고,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대형 병원이 있는 삼거리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툭!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죄송합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코앞에서 들려오는, 대략 ‘실례합니다’라는 느낌의 정중한 인사.
툭!
이어서 또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역시 시야에 아무도 잡히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행인들이 나와 반대로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언제 차올랐는 줄도 모르게 나타난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운명을 다루는 어떤 시계가 오작동하여 나를 그날로 데려간 듯했다. 한 택시 운전기사가 기묘한 여인을 태우고 이 거리에 처음 들어서던 날로. 택시기사는 택시로 이 거리를 벗어났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에 나는 미친 듯이 달리기를 선택했다.
툭!
툭!
툭!
점점 많은 사람과 몸이 부딪쳤다. 어깨, 팔, 다리…. 어떤 여자가 쓰러지며 그녀의 섬세한 보석들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 그를 에스코트하던 남자의 분노에 찬 목소리. 나는 귀를 막고 계속 내달렸다. 누가 따라오지는 않을까 몇 번씩 돌아보면서. 그러다 인도까지 길게 뻗은 커다란 고목의 뿌리에 걸려 엎어지고 말았다. 코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눈앞은 안개의 회색에서 짙은 암흑으로 바뀌어 갔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 나를 일으키려던 묵직하고도 다정한 손길을 느꼈다. 이를테면 수십 년간 운전대를 잡아 굳은살이 박인 어느 노신사의 손길 같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이미 저택의 안에 있었을 텐데. 다음날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어쩌면 그저 눈을 찌르는 태양빛이 었는지 모른다. 조금씩 달궈지는 한쪽 볼과 눈을 찌르는 빛에 나는 가물가물 깨어났다.
세상은 구십 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가벼운 뇌진탕이 있었는지 머리가 어지러웠고 보이는 이미지들은 춤을 추었다. 조각들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지더니 시야가 선명해졌다. 길 위를 바쁘게 오가는 건 아몬드 색의 가죽 구두가 아니라 두툼하고 둥근 스포츠화, 휘몰아치는 하얀 양말들, 등교하는 학생들의 발이었다. 사각지대에 엎어져 있던 내가 비척비척 일어서자 지나가던 아이들이 꺅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안도해야 했다. 코피가 나고 안경이 깨지고 행색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무엇에 안도해야 하지? 그래. 나는 유니온 클럽의 섬뜩한 장력에서 무사히 벗어난 것이다! 무엇에도 취하는 법을 모르는 나는 결국 진짜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음악도 향기도 누군가의 손길도 갈망할 줄 모르는 나는, 허기를 모르는 나는 안개의 거리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깊은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가슴 한켠이 칼에 베인 듯 쓰라렸다. 그 모순된 감정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음성 038’ 파일에 담겨 있던 재즈의 곡조를. 어젯밤 붉은 벽돌 저택의 노란 광원 속에서 들려오던 그 선율을 읊조리고 싶은 충동이.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아무런, 아무런 음정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