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아 Jul 04. 2021

안개의 거리 유니온 클럽 3

******

메일 제목: (제목 없음)

발신일: 2019/12/06, 03:00

발신자: 임승택


이 건물이 맞습니다! 바로 내가 봤던 그 건물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 저택이 존재하길 바랐는지 아닌지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믿기 힘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사진까지 찾아 보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분명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을 텐데요.


필요 이상의 집착은 말라고 조언도 해주셨는데…. 그날 태웠던 손님에게 감돌던 이국적인 향이라던가 단조 선율의 콧노래, 사람들의 구두 굽 소리 같은 것들이 머리에서 도무지 떠나질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피아노 연주곡의 제목이 떠오를 듯 말 듯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저는 분명 그 음악과 연이 있을 겁니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요


이상한 집착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이가 들면 시간여행을 도와줄 무언가를 붙들려고 애쓰게 되는 법이지요. 젊은 시절을 잠시라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 건물이 내게는 그런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당신의 메일을 받기 전에, 그러니까 그 일이 있고 이틀 뒤에 나는 그 저택의 소리를 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그곳을 찾았습니다. 내가 들은 소리를 남들도 들을 수 있는지 꼭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근처를 둘러보아도 그 샛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 며칠 안개가 끼지 않아 그런 것 같습니다. 안개 없이는 그 길 역시 열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

메일 제목: 한번 들어봐 주십시오

발신일: 2019/12/08, 04:30

발신자: 임승택

첨부파일: 음성 038.m4a


정인호 씨께서 유니온 클럽이라고 알려준 그 저택의 소리를 담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그렇게 고풍스러운 건물에 그런 이름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좌우지간 내가 녹음한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좀 알려주길 바랍니다. 내 동료들은 다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해서 나를 겁주고 있습니다. 자동차 경적에 귀들이 둔해진 게 분명합니다.



********


‘저 또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메일을 썼다 지우기를 여러 번. 하지만 그렇게 쓴다면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답을 하지 않기로 했다.


파일을 내려받아 재생했을 때, 처음 몇 초간은 무음에 가까운 전자음만이 들렸다. 내심 안도하면서 으려던 찰나,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건반 소리를 듣고 말았다.


나는 근무 중에 그 음성파일을 다시 틀어보았다. 집에서 홀로 듣기에는 아무래도 섬뜩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패턴을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그 희미한 선율은 들리다가 안 들리기를 반복했다. 임승택 씨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여 헛것을 듣는 건 아닌지 겁도 조금 났기 때문에 은근슬쩍 직장 동료들에게 틀어줘 보기도 했다. 하지만 곧 후회가 밀려왔다. 내 귀에 이따금 그 소리가 들릴 때도 그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임승택 씨가 느꼈을 공포가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에게는 들리지만, 남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 그것은 아마도 그 기묘한 저택의 추억을 우리 둘만 나누었기 때문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우리에게 다른 공통점은 있을 리 없었다.



*********

메일 제목: (제목 없음)

발신일: 2019/12/28, 01:00

발신자: 임승택


메일을 열어 보신 것 같은데 답이 없으시군요…. 상관없습니다. 답장 같은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사라질 날을 대비하여 어디에든 흔적을 남겨 두자는 생각뿐입니다. 요즘은 자주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고백컨데 나는 수시로 그 건물을 찾아갑니다. 안개가 자주 끼게 되면서 그 길 역시 자주 열립니다. 안개와 그 거리의 관계는 명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그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방이나 만찬 회장에서 풍겨오는 냄새겠지요. 계피 향료가 들어간 빵, 아니면 케이크일까요? 여하튼 그런 디저트의 냄새가 납니다. 꿀과 계피, 생강을 섞은 따듯한 음식의 냄새가 말입니다. 그 냄새를 맡고 있자니 몹시 식욕이 일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 벌써 며칠째입니다. 한동안 나는 허기를 채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만 오면 여러 가지 욕망이 되살아나는 기분입니다.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어제는 연회장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그 문을 여는 순간 모든 황금빛 조명이 꺼지고, 아무도 없는 텅 빈 홀을 보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이 멈추는 것이 겁이 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다시 그녀가 나타났습니다. 며칠 전과 똑같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2층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것인지…. 나는 있는 힘껏 도망쳤습니다. 그러다가 꽁꽁 얼어있던 연못 위에서 한바탕 고꾸라졌습니다.


아마 그 연못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던 모양입니다. 새하얀 얼음의 표면 위로 쉭쉭 소리와 함께 겹겹의 포물선이 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빗금들은 점차 내 쪽으로 모여들었지요. 나는 보이지 않는 스케이트 날에 손가락이 베일 새라 얼른 팔을 당겨 몸을 최대한 웅크렸습니다. 그들이 무어라 말을 거는 듯했지만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일어서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다시 엎어졌습니다. 그때 어느 차갑고도 부드러운 손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팔을 내려다보니 검은 망사 장갑을 낀 창백한 손가락이 보였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팔을 뿌리쳤는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2층에 있던 그 여인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얼굴에는 놀라움과 실망이 어려 있었습니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는 섬뜩함뿐이었는데, 돌이켜 볼수록 측은하고 미안한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정인호 씨의 먼 친척이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경비로 일했다는 그 사람 말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말이지요….

이전 12화 안개의 거리 유니온 클럽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