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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 Jul 04. 2021

풀 심는 아이들

동우는  눈을 의심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새하얀 남자아이가 버스 정거장 옆에 쭈그리고 앉아 보도블록 틈에 풀을 심고 있었던 것이다. 때는 2월 말. 아직 겨울의  공기와 새벽의 어둠이 사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런 날이었다. 다른 이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 모습이 하도 당당해 오히려 동우 자신이 유령이고 저쪽이 현실의 존재인 것처럼 여겨졌다. 아이는 왼손 손바닥에서 솟아오른 풀을 오른손으로 잽싸게 뽑아 바닥에 심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자란 풀들은 새싹의 부드러운 속성을 거스르면서 블록 틈새로 간신히 보이는 흙에 빨려들 듯 들어가 박혔다. 동우가 중얼거렸다.


"저게 현실일 리는 없지. 그러니까 유령은 저쪽이야."


정거장 주변의 틈이란 틈을 다 매우고 나자 아이는 허리를 펴지도 않고 도로 복판의 갈라진 틈으로 달려가 또 풀을 끼웠다. 마치 그곳에 틈이 있 날 때부터 알았다는  단번에 그 지점에 도착했다. 동우는 아이의 맨발이 시멘트 위에서 긁히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다시 중얼댔다.


"아무래도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 봐."


그는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서 지난 금요일 처리하지 못한 전산 업무들과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돌릴 거래처 담당자들의 목록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춘기업 김대리 쯤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길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 쪽으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맡은 일에 몰두했는지 아이는 큼지막한 차가 다가오는 도 모르는 눈치였다.


동우는 버스기사의 눈에도 같은 장면이 보일지 의심스러웠다. 초조하게 발을 구던 그가 자리를 박차고 도로로 나 손을 흔드려는 순간, 아이를 응시하는 기사의 시선이 앞창 너머로 들여다 보였다. 기사는 경적을 울리지도 않고 느긋하게 속도를 줄여나갔다. 당황하거나 분노한 기색 없었다. 버스는 아이가 중앙차선의 노란 두 줄 틈에 두세 포기 푸른 잡초를 심고 자리를 뜨자 그제야 동우의 앞에 멈추어 다. 그가 건너편 가로수 밑에 다시 자리를 잡은 아이에게 시선을 고장한 채 버스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님도 보입니까?"


그러자 기사는 기가 차다는 듯 '허!' 소리를 뱉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럼, 장님을 데려다 운전대를 쥐어줬겠어요?"


'그러니까 보인다는 말이겠지?'


동우는 자신이 당황한 나머지 질문에서 목적어를 빠트렸음을 상기했다. 왜 더 정확하게 묻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기사의 말은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보다도 동우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 생경한 존재를 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니.


"카드나 얼른 찍으세요."


카드를 꺼내어 인식기에 들이대는 동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다시 입춘기업의 김대리를 떠올렸고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경칩상사의 추주임까지 리스트를 정리했다. 이제 버스는 강남으로 이어지는 양화대교에 들어섰다. 어슴푸레한 햇살이 한강 너머로 밝아오면서 다리 양쪽 난간을 비추었다. 은근한 햇살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동우는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난간과 인도를 잇는 곳마다 조금 전 대로에서 보았던 아이와 똑 같이 생긴 아이들이 무리 지어 풀을 심고 있는 게 아닌가. 이쯤 되자 그는 더 이상 맘을 추스를 수 없었다.


"대체 저 아이들은 뭐죠?"


기사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뭐긴 뭐예요. 풀 심는 애들이지."


기사는 한 술 더 떠 창을 열고 아이들에게 외쳤다.  


"서두르는 게 좋겠다! 이제 곧 해가 완전히 뜰 거야!"


그러자 아이들은 알려주어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 세 걸음만에 다리 , 태양의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반쯤 열린 운전석 창문으로 강내음 섞인 포근한 바람이 들어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사는 백미러로 멀어져 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렇지, 그렇지'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멀리 보이는 신호등의 신호가 막 초록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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