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목소리는? 또는 그 소식을 담은 문자들은? 그 모든 지점에는 당신이 모르는 나와 내 동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래전 나는 어느 작은 나라로 파견되었다. 그 땅에 채워져 있던 전쟁의 족쇄가 마침내 벗겨지게 되었다는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에겐 육체도 목소리도 없었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잠깐씩 빌려야 했다. 나는 어느 신사의 몸을 빌어 그 소식을 전했는데, 몇 년 뒤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그의 모습을 딴 동상이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동상보다는 동상이 세워진 공원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근처로 파견되는 날이면 반드시 그 공원을 가로지르곤 했다. 높게 자란 떡갈나무와 소나무들이 파란 하늘을 채우고 있었고, 그 밑으로는 회양목과 사철나무가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곳곳의 잔디와 인공 호수의 주변으로 봄이면 개망초나 씀바귀, 찔레꽃들이 번갈아 피어났고, 여름이 오면 잠들어 있던 능소화들이 깨어나 아름다움을 뽐내며 돌담을 장식했다.
어느 겨울 새벽. 몸이 고단해서 공원의 작은 밴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언덕 너머에서 아이들의 새벽 찬송 소리가 자욱한 안개를 타고 전해져 왔다. 일찍부터 깨어나 재잘대던 참새들과 까치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던 젊은 부부에게 새 생명의 소식을 전하러 가던 내 동료들도 멀리서 그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내가 잠시 빌린 청년의 몸 안에서 정겨운 감정이 솟아나더니 이내 노래의 후렴구를 따라서 불렀다.
"...아기 잘도 잔다 ...왕이 나셨도다."
국화꽃처럼 노란 원을 그리며 빛나던 가로등 불이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 앞에 고개를 숙일 때쯤, 공원 뒤의 집들을 모두 순회한 아이들이 종종걸음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눈길을 내려왔다. 그들의 볼은 석류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고, 작은 구름 같은 입김이 입 주변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그들의 손에 들린 바구니는 반도 채워지지 않았는데, 어른들이 조금씩 담아준 사탕과 떡 몇 조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다음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온 소식이 세상에 전해진 게 불과 몇 년 전이라는 사실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저 아이들 모두 전쟁을 겪었다. 그들 부모의 어깨에 이 땅의 질곡 많은 역사가 지운 무게를 저들도 분명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토록 밝게 웃을 수 있다니! 나는 그것을 순수나 무지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저들은 어른들과 달리,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쁜 순간을 만끽하는 재능을 아직 잃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열의 맨 끝에서 걸어가던 양갈래 머리의 소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세요?"
소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은 드문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나를 알아보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아이가 재차 물었다.
"어떤 소식을 전하러 오셨어요? 좋은 소식? 아니면 나쁜 소식?"
내가 대답했다.
"나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단다."
그러자 소녀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등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보다 기쁜 소식인가요?"
"아니."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기쁜 소식은 없지. 그거 아니? 그 소식은 오로지 너희들만 전할 수 있어."
아이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조금 전 받은 사탕 두 개를 쥐어주었다.
"하나는 당신 거고, 다른 하나는 소식을 받게 될 사람에게 주는 거예요."
이번에 내 소식을 받을 사람에게 주자면 사탕 한 개로는 부족한걸?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될 테니까. 나는 이렇게 아이를 놀려주고도 싶었지만 사실은 감동에 겨워 손을 내려다볼 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아이는 대열에 합류하여 멀어져 버린 뒤였다.
나는 소녀를 잊지 못해서 얼마 뒤 다시 공원을 찾았다. 내겐 고작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인간의 세상에서는 수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아이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대신 그녀와 똑 닮은 아이가, 막 걸음을 뗀 맑고 검은 눈의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저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 그 소식을 전한 동료는 누구였을까? 그게 나였다면 좋았을 것을! 이런 생각을 하며 서 있는 동안에도 공원의 시간은 흘러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었다. 다갈색의 떡갈나무 잎과 도토리들이 잔디 위로 떨어져 내리고, 노란 꽃잎과 솜뭉치 씨앗들까지 전부 떨궈낸 씀바귀들은 마른 뼈대만 앙상하게 남겨 놓았다. 이 모든 것 위로 새하얀 눈이 덮였고, 또 얼마 후 겨울잠에서 깨어난 청설모들이 지난해 감춰둔 도토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늘 한결같이 엉뚱한 곳만 파헤쳤다.
"아니야, 그 옆이었어."
작은 설치류는 참견꾼이 성가시다는 듯 노려보고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가 맞대도, 하면서 나는 눈이 녹아 축축해진 흙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나 그곳에는 도토리가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솟아난 새싹 정도. 손 안의 도토리를 보고 있자니 옛 친구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날의 나는 또 다른 기쁜 소식을 들고 공원을 찾은 것이었고, 또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체면을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중년의 남자로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위인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에 동요한 것인지, 그는 내가 오래전 겨울에 들었던 노래를 마치 아이처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사탕을 쥐어 주었던 소녀가 중년에 다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제 또래의 어린아이를 깨운 것이었다. 한 아이가 수천수만의 전령들도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들을 계속 계속 해내고 있었다.
"질 수 없지."
나는 들고 있던 도토리를 다시 흙 속에 묻어주고는 부지런히 다음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