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아 Jul 03. 2021

안개의 거리 유니온 클럽 2

***

문의번호 1407에 대한 답변

게시일: 2019/11/23, 16:10


안녕하세요, 임승택 님.

첨부파일에 표시해두신 장소를 알아본 결과

택지개발사업이 예정된 구역으로

현재로선 건물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

 

나는 좀 더 빨리 답을 하지 못한 것에 대 사과를 먼저 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신중하게 알아본 후 답을 하고 싶었다. 빨리 쳐낼 수 있는 일들을 먼저 처리하고 나니 하루 하고도 반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정동 8-12 번지’라는 주소는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마침내 조사에 착수했을 때는 그 문의글을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국토부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구청 지도에서 주소지를 우선 확인해보았다. 업데이트 날짜는 불과 5일 전. 임승택 씨가 언급한 날에서 하루 전의 지도였지만 그 사이에 건물이 솟아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의 말 대로 번지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서 나는 근방의 부지 개발 기록을 열람했다. 그것들은 10년 단위로 묶여 있었는데, 임승택 씨가 표시해 둔 위치는 다섯 개의 장부를 넘기도록 개발제한구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제한은 내년이면 풀릴 참이었다. 참고 삼을 생각에 식생 지도까지 들춰보았지만 그 위에는 ‘트인 땅’이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나는 얼마나 오래된 기록까지 들춰봐야 하는 걸까 슬슬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딱 열 번째까지만 열람해보는 거다’ 하고 여섯 번째 장부를 펼쳤을 때, 같은 자리에 그려진 작은 사각형 기호를 발견했다. 축적을 보니 정말로 이백 평 남짓 되는 건물이었다.


“유.니.온.클.럽.”


건물 밑에 찍힌 흐릿한 글자를 소리 내어 읽 보았다.  8-12번지의 유니온 클럽이 바로 임승택 씨가 문의한 문제의 저택라고 짐작할 수 있었던 건 서술 덕분이었다. ‘아치형 테라스.’ 이름을 입력했을 때 조회되는 무수한 흑백 사진 중에서 둥근 테라스를 가진 건물들 추린 다음, 두어 장의 후보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찬찬히 살피던 중 나는 오싹한 기분 맛보았다.


동서양의 양식이 뒤섞인 듯한 저택 주변으로 테니스 라켓이나 악기, 스케이트화 등을 들고서 미소 짓고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2층 테라스에 외따로 나른한 듯 기대어 선 여인…. 털로 된 숄에 거의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벨벳 드레스는 겨울의 태양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흑백 사진이었지만 그 드레스의 색깔을 알 것만 같았다….


책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길 여러 번. 한참 고민 끝에 나는 개인 계정의 메일함을 열었다.


 

*****

메일 제목: 임승택 씨에게

발신일: 2019/11/24, 23:56

발신자: 정인호


안녕하세요. 구청 문의 게시판에 답변을 드렸던 담당자입니다. 공식적으로 드린 답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드리고자 메일을 드렸습니다. 솔직히 임승택 씨의 글이 조금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는 걸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허구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묘사가 너무도 구체적이어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더 해 보았습니다.


그 건물은 존재했습니다. 다만 반세기 전에 말입니다…. 임승택 씨도 이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계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확인이 필요하셨던 거지요.


택지로 바뀌기 전 그곳은 수년간 빈터였습니다. 조금 더 이전의 자료를 조회해 보니 ‘유니온 클럽’ 소유의 건물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당시 외교적인 문제로 한국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 또는 스포츠클럽을 위한 공간이었던 겁니다. 저보다 연배가 있으시니, 들어본 적이 있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자료실에서 건물의 사진도 몇 장 발견했습니다. 파일로 첨부해 드렸으니 목격하신 저택이 맞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실은 이 메일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임승택 씨를 더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먼 친척 중 한 사람도 고궁을 지키는 경비 일을 하다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오래전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가끔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겁니다. 동료분들의 얘기도 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신비로운 잔상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시거나, 본인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끼시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동안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들었습니다. 기온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눈으로 바뀔지도 모르겠군요. 운전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에겐 고 계절이겠지요. 모쪼록 사고 없이, 따듯한 겨울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정인호 드림.


이전 11화 안개의 거리 유니온 클럽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