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기연은 늦게까지 사무실에 머무는 일이 잦아졌다. 밤중에 홀로 어지러운 망상들에 시달리기보다는 차라리 도시 한가운데의 소음들, 달리는 차의 소리와 왁자지껄한 취객들의 고성을 듣는 편이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몸이 노곤해질 만큼 일한 뒤 집으로 들어가면 기이한 허기를 느낄 새도 없이 쓰러져 누울 수도 있었다.
"기연 씨, 뭐해?"
직장 동료가 멍하니 앉아있는 기연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는 기연에게로 걸려온 전화를 대신 받으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의 기억들이,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버스에 올라탄 모든 기억들이 증발해 버렸다…. 꿈과 현실이 경계가 무너지며 만들어낸 흐릿한 잔상.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느 시점부터 이 흐릿한 잔상들로 점철된 그림처럼 변하는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답답함을 떨치기 위해 수오 없이는 찾지 않던 옥상에 홀로 오를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괴로운 일이 되었다. 눈이 밝은 햇살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탓이었다. 사무실의 무수한 조명 아래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곤욕스러웠다. 빛과 햇살을 좋아하던 소녀가 오로지 어둠 속에서만 아늑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모처럼 명료한 의식이 돌아왔을 때 건물에 남아 있는 건 기연 혼자였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이 며칠이지….’
내 것인 줄 알았던 시간이 다른 존재에 의해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종국에 하나의 점으로 줄어들어 마치 블랙홀이 그러하듯 그녀 자신의 육신과 함께 영영 삼켜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몸이 떨려왔다. 한편 점과 동그라미는 이제 공포의 형태에서 까마득한 고향의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괴로움도 불안도 없는 아늑한 고향의 형태를.
사무실 문을 닫으며 기연은 퇴근 카드를 찍었다. 복도가 온통 어두웠지만 스위치를 찾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겨우 가라앉은 통증이 다시 도질지 모를 일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현관을 향해 걸어갈 때, 작은 물체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그것이 내는 소리에 기연의 입 안에는 침이 고였다.
데구르르르.
창밖 네온사인이 바닥에 만든 사각형의 빛 그림자 위로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구르르르.
구슬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그녀 쪽으로 굴러왔다. 미미해서 곧 끊어질 듯한 숨소리와 함께 기름진 눈물의 냄새와 부드러운 달빛의 기운이 훅 끼쳐왔다. 어둠 저편에 그가 있었다….
기연은 달아나고 싶은 건지 쓰러져 기대고 싶은 건지 모를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는 흐리멍덩한 삶의 윤곽을 깨끗이 지울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았다. 저 망토를 벗기면 이 끝 모를 불안과 배고픔을 떨쳐낼 수 있지 않을까…. 저 아이는 다만 그것을 대신 벗겨줄 사람을 오래도록 찾아온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굶주린 건 자신도 구슬 왕자도 아닌 저 낡은 망토가 아닐까, 속으로 읊조리면서 기연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를 높여가며 어둠으로, 구슬 왕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스르륵. 망토 자락이 바닥에 쓸리며 뒷걸음질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놓칠 새라 기연은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검은 테두리의 필름이 돌기 시작할 때처럼, 여름날의 지하철이 철교의 기둥들을 지나갈 때처럼 밤의 불빛들과 창틀이 만든 그림자가 그녀의 오른쪽으로 빠르게 교차하며 지나갔다.
그런데 저 얼룩은 무얼까? 앵글 너머로 멀리 빌딩 틈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검은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새는 순식간에 형태를 키우더니 어느덧 달리는 그녀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날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유리를 부술 듯 몸을 내던졌다. 두꺼운 틀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추락하다가 다시 날아올라 몸을 내던지길 반복했다.
구슬들이 만들어낸 섬광들이 창문과 기둥을 지날 때마다 현란하게 깜빡이는 통에 기연은 숫제 눈을 감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참 전 끝났어야 할 복도가 계속 이어지며 시간과 공간의 틈 어딘가를 달리고 있는 듯한 막연함이 느껴지자 점점 숨이 차올랐다. 그때, 까악까악 절규하는 새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토와 기연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새는 반쯤 열린 창문을 발견하고는 몸을 욱여넣었다. 틀에 걸려 뽑혀나간 깃털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바닥의 구슬들과 한데 뒤섞였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몸싸움을 벌이듯 나뒹구는 와중에 까마귀는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피투성이가 된 새가 기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녀가 망토로 팔을 뻗은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이미 그녀의 손끝은 부드럽고 낡은 직물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누구에게 말하는 줄도 모르는 채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먼저 까마귀의 몸부림이 멈추었고, 이어서 유리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던 투명한 탁음이 멈추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정적을 어림하던 기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돌연 한껏 확장된 두 개의 동공이 그녀의 눈을 덮쳤다.
그것은 커다란 비극에 대한 깊은 분노와 슬픔, 절망과 두려움을 투영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 기류에 휘둘려 눈물을 쏟던 기연은 문득 영상 너머에 움츠리고 있던, 작고 빈번한 일상에서 탄생한 소년의 기쁨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달큼한 사탕의 냄새, 아버지와의 새벽 산책 같은 것을…. 그러자 마치 허락이 떨어진 듯 그녀는 소년이 땅에 묻힌 이래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의 눈동자 색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화가가 그려 넣은 에메랄드 색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와 꼭 같은 색, 흙과 밤의 색, 죽은 듯 보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미지의 것들과 생명을 품고 있는 색, 수없이 많은 씨앗과 별을 품고 있는 바로 그 색이었다. 이윽고 기연의 발밑으로 눈 부시도록 환한 세상이 펼쳐졌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하얀 천에 덮인 채 움직이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우아한 유령이나 천사의 것처럼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짧은 찰나의 종잡을 수 없는 이 여정들이 기연에게는 마치 어느 불쌍하고 어린 영혼의 안내를 거치고 있는 듯 여겨졌다. 그녀가 초대받은 새로운 세상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익숙한 살갗의 감촉은 옥상의 더운 바람과 푸른 하늘, 가보지 않은 바다와 이국적인 풍경들을 그녀의 내면에서 하나 둘 차례로 일으켜 세우더니 잊어버린 기억까지 되찾아 주었다. 지우개로 문댄 듯했던 흐리멍덩한 그림은 사라지고, 마침내 그녀의 궤적이 선명하게 남은 그림이 나타났다. 기연은 자신의 궤적 옆을 조심스럽게, 나란히 따라오는 검은색의 선을 알아차리고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애타게 찾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자마자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안에서 샘솟았다.
동의를 구하듯 기다려주던 손이 힘차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러자 하얀 장막의 세상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한층 뚜렷해진 풍경들이 발밑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들렀던 도서관, 일터와 집, 수오와 만났던 학교, 호수가 아름다웠던 고향집과 불에 타 사라져 버린 전시관이 강물 살에 휩쓸리듯 지나갔다. 그리고 둘은 바다 위를 날았다.
이 모든 장면을 소나무 우듬지에 앉아 지켜보던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있었다. 대상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그들만의 기록의 언어가 마치 기다렸다는 물 위의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파동은 세월이 흘러 어린 새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묻는 이야기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인간이 옮긴 어느 역사보다 더 정확한 한 줄의 고리가, 시간과 장면을 잇는 생명의 고리가 되었다.
기록을 나르던 몇몇의 새들은 이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고조될 때면 가지 위로 솟아올라 동그란 원을 그리며 말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 첫 줄을 인간의 언어로 옮기자면 대략 이런 문장이 되었다.
오래전 소녀와 구슬 왕자와 까마귀가 있었지.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