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죽음이 남긴 많은 흔적

보고 싶은 동생

동생의 죽음이 남긴 많은 흔적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 2021년 8월 22일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나가 온갖 힘든 일을 하며 세상과 싸운 동생이다. 대학교에 다니는 형에게 용돈을 주고 조카들을 너무나 사랑했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랑스럽고 멋진 내 동생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동생의 죽음은 형인 나에게 너무나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다. ‘그동안 나는 동생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동생의 죽음은 형인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형이라는 존재에서 이제는 철저히 혼자라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술만 마시면 “엄마 찾아줘.”라며 투정 부리던 동생이 이처럼 빨리 천국에 가게 되어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동생은 최선을 다해 살았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접하는 죽음이지만 동생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형제간의 우애 깊은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고인이 된 동생에게 어떤 말보다도 “그동안 함께해 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가장 하고 싶다. 동생과 좋은 추억 만들고 서로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바랄 뿐이다.


동생의 장례는 일산장례식장에서 치렀다. 동생이 유언을 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당연히 부모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여린 동생은 술만 마시면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찾아줄게.”라는 막연한 말만 되풀이하였다. 동생이 떠난 지금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엄마를 찾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부모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부모를 뵙게 된다면 꼭 동생이 안장된 곳에 가서 인사를 나누도록 하고 싶다. 나는 사실 부모를 찾는 것에 회의적이만 동생을 위해 형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는 동생을 위해 상주의 역할은 내가 하였다. 제수씨는 힘든 가운데 조문객을 맞이했다. 동생의 빈자리를 우리는 함께 의지하며 그동안 못 푼 정을 나누며 장례식을 최대한 원만하게 치르려고 하였다. 특별히 동생이 17세에 사회에서 만난 27년 지기들이 장례 절차에 너무나 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 역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정신적으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동생이 17세에 사회에 나와 삐끼, 불법음란물 판매, 선원, 노가다 등 온갖 굳은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 10여 명이 전국 곳곳에서 한걸음에 달려와서 발인까지 함께하였다. 동생의 절친이 이렇게 많은 것을 처음 알게 되어 놀랐지만 그동안 동생이 헛되게 산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참 뿌듯했다. 중학교만 졸업한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친구들을 통해 들으며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형으로서 그동안 더 잘해 주지 못한 마음이 들어 너무나 슬펐다. 내가 알지 못한 일을 하며 치열하게 산 세월을 생각하니 참 불쌍하다는 생각과 멋진 동생이었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친구들이 말하는 동생은 참으로 멋졌다고 한다. 친구들을 잘 아끼고 유머가 있었으며 의리가 있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힘들 때 함께 아파하고 기쁠 때 지나칠 정도로 칭찬해 주는 믿음직한 친구였다고 한다. 많은 일화 중 가장 멋진 일은 보육원에서 함께 산 내 친구의 동생을 끔찍이 아껴준 것이다. 동생은 보육원에서 함께 성장한 내 동기와 함께 사회에 나가 일했다. 동생은 17세이며 내 동기는 18세였다. 그들은 사회에서 친구로 지냈다. 내 동기이지만 사회에 나가서는 동생의 친구가 되어 함께 의지하면서 내가 하지 못하는 역할을 대신해 준 것이다. 사실 내 동기는 가출을 자주 하고 공부를 싫어 하는 비행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내 동생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내 동기와 동생은 함께 배도 타고 사회에서 함께 의지하며 살다가 내 동기가 30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운명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나와 동생은 적잖게 놀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인에게 하나 있는 친동생이 가장 걱정이 되었다. 내 동생은 고인의 동생이 겪는 슬픔을 덜어 주고자 무척 노력하였다. 동생이 돌봐준 그 후배는 장례식장에서 자신은 내 동생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다며 영정 앞에서 연신 울었고 미안하다며 울부짖었다. 자신의 친형을 잃고 또한 자신을 끔찍이 아껴준 내 동생의 죽음 앞에 친형인 나보다 더 절규하며 울었다. 어떻게 보면 그 친구는 두 명의 형을 잃고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는 그의 형이 되어 줄 것이다. 보육원에서 만난 형제로서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게 될 것이다.


동생은 나에게 자식과도 같았다. 다 큰 성인이라도 동생은 말 그대로 동생이며 나는 동생을 지켜야 하는 부모였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세상에 두 형제만 있는 것도 슬프고 너무나 암담하고 특별한 상황인데 동생이 먼저 천국에 간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 같다. 아무나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이 왜 나에게 닥쳤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상황에서 쓰러지기보다는 이러한 일로 인해 더 강해지고 누군가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동생을 앞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든다. 그동안 동생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한편으론 동생이 아기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동생을 생각하며 애처롭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 그토록 때리며 혼을 낸 탓에 성인이 되어 더 이상 뭐라고 혼내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내가 교사가 되기 위해 살아온 환경과 동생이 바닥에서 시작하여 치열하게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악착스럽게 산 환경은 너무나 다르지만 언제나 동생은 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 같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이런 것인가. 장례 기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니 눈물이 반사적으로 나왔다.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한 아쉬움,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슬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여움이 합쳐져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정신적 고통으로 몰려왔다. 그럼에도 적지 않는 분들이 찾아와 줘 큰 위로를 받았다. 특히 보육원 후배의 방문은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동생과의 일화를 들려준 보육원 후배들이 동생을 잘 기억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동생을 좋아한 후배, 동생과 함께 가출한 후배, 동생과 함께 도둑질한 후배, 동생과 함께 매 맞은 후배, 같은 중학교에 다닌 보육원 동생에게 맛 나는 것은 준 후배 등 그들이 말해 주는 동생에 대한 좋은 이야기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를 더 밝고 풍성하게 해 주었다. 동생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많은 것에 감사했고 동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있음에 감사했다. 보육원 선후배를 항상 가족이라 생각했듯 보육원 가족 40여 명이 함께 슬퍼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장례 때 찾아온 많은 분에게 여러 얘기를 들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는 동생이 평소에 나를 많이 칭찬했다는 것이다. 형을 가장 존경한다는 말을 주변에 많이 했다고 한다. 사실 동생의 휴대폰에 나의 이름은 ‘이선생’으로 저장돼 있었다. 만나는 지인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형이 선생님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교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동생이 살아온 경험과 동생이 학창 시절에 꾸중을 많이 한 교사는 매우 대단한 존재였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동생에게 “형은 선생인데 너는 뭐냐?”라며 놀리곤 했단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기분이 조금 나쁘기도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장례 기간 중 동생의 한 지인이 “성만이 형이 형보다 훨씬 착해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 고개가 숙여졌다. 누군가 고인이 형을 최고로 존경한다고 했다더라고 얘기하자 옆 친구가 “성만이 형은 돈도 잘 빌려주고 우리를 잘 아껴준 형이었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다.


동생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에 나가 일을 했다. 그동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동생의 인생,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살았을지를 고인이 된 다음에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회에 나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장례 기간에 더 알게 되었다. 동생의 친구들을 통해서 말이다. 동생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을 때부터 함께해 준 친구들이 오늘따라 얼마나 고마운지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은혜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동생이 보육원 출신인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친구가 되어준 그들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보육원 퇴소 후 나보다 훨씬 자주 동생을 만나 함께 놀아준 고마운 동생 친구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나는 내 평생 처음으로 가장 큰 이별을 경험했다. 혈육이라곤 동생뿐인데 그 동생과 헤어지게 되었으니 내 자신이 참 안쓰럽기도 하다. 장례를 치르며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니 나는 직장생활을 하며 수많은 장례식에 가 보았는데 정작 내 가족의 죽음은 처음 접하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조부상이나 조모상을 경험한 적도 없고 가까운 친척의 죽음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동생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온 것 같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혈육의 죽음을 한두 번은 접했을 텐데 나는 처음으로 접하는 거라 참 이상하기도 했다. 그만큼 충격이 크게 느껴진 것 같다.


조문을 온 누군가 위로하며 말한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떠나 어떡하냐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부재를 나보다 더 안쓰럽게 생각하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자칫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만날 수는 없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의 친척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들의 여의치 않는 상황 탓에 나를 만나러 오지 못할 뿐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세 딸이 있기에 혼자가 아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 세 딸에게 삼촌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었다. 사실 동생이 천국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녀들에게 언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무척 고민스러웠다. 결국 장례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자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빠의 소리 없는 울음에 아이들도 함께 울었다. 아이들에게 삼촌으로서 앳살 있게 대해 준 동생이었기에 아이들도 무척 슬퍼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대학생 때 삼촌이 용돈을 줬기에 아빠가 지금 교사가 되었고 우리는 서로 참 많이 의지했으며 삼촌이 있었기에 지금의 너희도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한참을 울면서 삼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후 우리는 함께 기도를 했다.


드라마에서만 본 영화 같은 우리 형제의 이야기는 나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 우리 형제의 진한 이야기를 다시 쓸 순 없지만 두 형제의 따뜻한 이야기를 소중히 간직하고자 한다. 나는 이번 장례를 통해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형제를 잃은 분들의 마음을 100% 이해하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 형제를 먼저 잃은 분이 너무나 많이 있다. 20대 중반에 오빠를 잃은 보육원 후배, 극단적인 선택을 한 형을 잃은 보육원 후배 그리고 사고로 형을 먼저 잃은 교회 집사님. 정말이지 세상에는 오빠나 누나, 동생과 일찍 헤어진 사람이 왜 이리도 많은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또한 남편을 먼저 보내 이들, 아내를 먼저 보내 이들도 있다.

이전엔 무심코 가볍게 여긴 그들의 죽음이 이제는 절대 가볍지 않게 여겨진다.


임마누엘 보육원 원장님은 동생의 부고를 듣고 펑펑 우시며 오빠 2명이 먼저 소천하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사실이 이제야 너무나 가슴 아프게 여겨진다. 사람은 참 간사하고 무능하다는 말이 참 맞는 것 같다.

장례식장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현재는 40대 초반이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보육원의 한 후배는 내 동생을 좋아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아무리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내 동생이 더 대견스럽고 멋지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동생의 부고를 듣고 가장 먼저 달려와 장례 일을 밤새 도와주었다. 사실 그 후배는 1년 전 보육원 한 후배가 자살했을 때도 그 장례식장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 후배이다. 그 후배는 동생을 잃은 나에게 자신이 왜 이런 장례식장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 후배는 20대 초반에 20대 중반인 친오빠를 잃었다. 배달 일을 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하늘나라에 간 오빠의 장례를 20대 초반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치르게 되었다. 그 시절 아무것도 모를 때 장례를 치른 경험을 통해 장례일이 남의 일 같지 않고 특히 형제가 이별한 경우에는 특별한 공감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고 했다. 그 후배의 오빠의 죽음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 그 후배의 나이가 너무나 어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40대 중반에 죽게 된 동생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생 친구들을 20대에 자주 만났다. 그들은 사실 나랑 나이가 같다. 동생은 사회에 나가 나이를 한 살을 올렸다. 그들은 나와 나이는 같지만 형으로 대해줬다.

동생이 나를 윗사람으로 대하는 만큼 나를 존중해 주었다. 교사인 내가 절대 알지 못하는 경험과 어려움을 겪었던 그들과 보이지 않는 벽이 그동안 있었다.

‘난 동생처럼 살진 않아야지. 난 동생 친구들처럼 살지 않고 사회에서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며 노력했다. 난 이미 사회에서 존경받는 훈장수여자이지만, 그들이 무척 자랑스럽다. 척박하고 황량한 사막 같은 환경에서 끈질긴 잡초처럼 서로 도우며 의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그들이 존경스럽다. 그들이 진정한 승리자이다.


장례식에서 한 보육원 후배가 “형이 잘못했네요.”라고 얘기했다. 동생의 죽음은 형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동생이 죽은 마당에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나는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말을 듣고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평범하게 동생을 잘 보살피지 못한 것과 형은 교사로서 무난하게 살면서 동생은 온갖 고생을 한 것을 비교한 것 같다. 이유야 어쨌든 동생의 죽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나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 후배가 나의 잘못을 이야기한 것에 동의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책감에 빠져 있는 것은 동생이 원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생은 나와는 27년간 떨어져 있었지만 나름대로 원하는 인생을 살았고 형의 인생을 존중해 줬다. 따라서 나의 잘못이 있지만 그 잘못이 나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능적인 잘못이 있음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례를 치르고 나는 동생을 잃은 내 마음을 스스로 어떻게 위로할지 생각해 보았다. 동생을 잊고 사는 것과 우리 가족에게 집중하는 것과 내 학교 일에 집중하는 것 등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기도도 해보고 스스로 감사의 조건을 찾아 매일 공책에 적어 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데 도움은 되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힘이 된 것은 첫째 딸의 외모였다. 우리 부부는 동생이 나와 닮지 않은 것을 궁금해하곤 했는데, 우연히도 첫째 딸이 동생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왼쪽 허벅지에 있는 점의 위치도 같다는 것이다. 동생을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첫째 딸의 외모에서 동생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행복하다.


동생의 죽음을 통해 나는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모 없이 힘들게 살다가 생을 마감한 동생과 비슷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고 있다.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동생이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을 누군가에게 주기 위함인 것 같다. 과연 나는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할까. 동생이 나를 참 자랑스럽게 생각했듯 앞으로도 나는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번 장례를 통해 감사한 것이 너무 많다. 주변 지인들의 형제에 관심이 생겼다. 조의금을 보내준 보육원 후배에게 ‘너는 형제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혼자라고 했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며 생각한 한 후 다시 이복동생이 있다고 했다. 엄마가 다른 동생, 하지만 연락을 안 하니 남이라고 한다. 애처롭다. 그는 혼자라 외롭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나는 동생이 있었기에 그동안 참 행복했다. 이 땅의 망자 중 무연고자가 많다. 특히 고아인 망자 중에 무연고자 많기에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외로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동생이 무연고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2020년 8월 나는 《나는 행복한 고아입니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제목에 고아라는 말을 쓰는 것이 다소 고민되고 불편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혼자라는 생각에 진정한 고아의 느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진짜 고아이다. 유일한 혈육이 없어진 진짜 고아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고아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 고아라는 특별한 자격이 특별함이 되길 바라 본다.


동생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분은 단연 우리가 성장한 보육원 원장님이다. 나는 지금도 그분을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분은 동생의 죽음 소식을 전화로 듣고 감정이 격해져 절규하듯이 우셨다. 혹시나 연로하신 그분의 건강을 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원장님은 우리 형제를 무척 아끼셨다. 내가 교사가 되기까지 기도와 격려로 늘 도와주셨고 동생이 일찍이 형과 떨어져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렇기에 동생의 빈자리를 무척 고민해 주셨다. 물론 보육원 출신이 천국에 가는 일을 많이 경험했지만 이번 상황만큼은 더 애달파해 주었다. 나 역시 그분께 동생의 부고를 알리면서 너무나 죄송했다.


어머님이 연로하시긴 하지만 두 명의 오빠와 예전에 이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형제의 이별에 대한 아픔을 알고 있다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를 보고 얼마나 더 큰 사람이 되려고 하나님이 이런 아픔을 주시는지 생각하라며 너는 더 큰 인물이 되고 큰 지도자가 될 것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시련을 접하게 되지만 그 시련을 얼마나 잘 이겨내고 그것을 성장하는 계기로 삼느냐에 따라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즉 보육원에서 성장한 환경을 이겨내고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아픔도 이겨내는 것은 더 멋진 인생을 만들어가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함께해 준 동생에게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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