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停泊)

강 위에 멈춘 서양의 그림자

by 강라마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걷다 보면, 한때 이 도시가 세계로 나아가던 첫 관문이 서 있다.

흰색 몰딩과 아치형 창, 벗겨진 페인트와 열린 셔터.
THE EAST ASIATIC COMPANY (THAILAND) 오래된 글자가 아직 그 벽에 남아 있었다.


이곳은 덴마크 선장 한스 닐스 안데르센(Hans Niels Andersen)이 세운 무역회사의 태국 본사였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길을 이 강가에서 개척했고, 목재와 주석, 쌀과 면직물이 오가던 부두에는 낯선 언어와 사람의 발자국이 겹겹이 쌓였다.


건물은 이제 공사장 펜스에 둘러싸여 있다.
균열진 벽 사이로 덩굴이 자라고, 창문은 반쯤 열려 지난 시간을 내보낸다.
현대식 호텔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라지만, 그 변화의 속도를 바라보며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곳이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박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강을 따라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낯익은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Asiatique The Riverfront.

낮에는 한산하지만, 밤이 되면 수천 개의 불빛이 일제히 켜진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야시장일 뿐이지만, 그 자리야말로 이스트 아시아틱 컴퍼니의 부두와 창고가 있던 곳이다. 거대한 창고 벽돌 위에 카페와 상점이 세워지고, 컨테이너가 머물던 자리에 사람의 발걸음이 넘친다.

예전엔 무역선이 머물던 강이, 이제는 관광객의 카메라와 웃음소리를 싣고 흐른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이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던 시절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억을 소비하는 시대의 풍경이다.


이 회사의 본사는 이제 라마 4 로드 쪽으로 옮겨졌다.
강변의 창고와 부두는 매각되었고, 오래된 본사 건물은 ‘호텔 노부(Nobu Hotel Bangkok)’로 재생 중이라 한다. 그래도 나는, 이곳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표정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한때 세계가 이곳으로 들어왔고, 지금은 세계가 이곳을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박은 끝났지만, 낡은 벽과 닫히지 않은 창문 사이로 그 시절의 바람과 바다의 냄새가 아직도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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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박(停泊)> 2025.11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Ga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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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박(停泊)> 2025.11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Ga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