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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기도설 May 10. 2024

봉지라면

- 깊어지는 사랑 

새벽 2시.
앞서가는 사람들의 헤드랜턴 빛과 짙은 회색빛이 어우러져 한밤중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보름달 빛과 총총한 별빛으로 물든 산중턱은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그이는 나란히 걷다가 앞서다가 손을 잡아주기를 반복한다.


 "어때, 이런 야간산행을 해본 적이 있어? 내가 말한 대로 동화 나라 같지!"
지혜는 끄덕이며 그이의 손을 꼭 잡는다.


"등산화가 부담스러웠는데, 흙이 안 보여서일까, 구름에 떠다니듯 둥둥 떠가는 것 같아"

지혜는 그이의 어깨에 가끔 손을 얹고 도움을 받는다. 설악산 입구에서 그이는 지혜의 배낭 짐을 덜어내어 자기 배낭으로 옮겨 담는다.


''여벌의 바람막이 옷 하나만 넣으랬더니 무얼 챙겨 와"


그이는 데이트 때마다 지혜에게 가고 싶은 곳, 먹어보고 싶은 음식 그리고 그날의 기분이 어땠는지 묻곤 했다. 


양수리 두물머리, 현리, 인제, 고성 바다. 

지혜와 간 곳들이다. 
그이는 일요일이면 이른 새벽에 데리러 와서 늘 운전을 해주며 산을 보고, 하늘을 보라고 했다.


설악산장이 개소했다며, 야간산행의 묘미를 느껴보지 않겠느냐는 그이의 말에 지혜는 주저 없이 같이 가겠노라고 했다. 산악회 동아리에서 야간산행의 재미를 설득하여도 꿈쩍도 하지 않던 지혜는 그이의 말에 바로 동의하며 엄마에게 산악회 핑계를 댔다. 


친구들과 노느라 늦은 밤 귀가를 한 적은 있어도 만난 지 이제 넉 달 남짓 된 남자와 야간산행을 감행하는 지혜는 그이와 동행함을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그이의 선배 두 명이 지혜를 안내한다.
"여기는 산장이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대피소예요. 산행 중에 갑자기 눈, 비가 오거나 할 때 쉬어가라고 있는 건데,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몰랐죠!"

"저 녀석을 오래 만나왔어요? 여기 라면 봉지를 이렇게 윗부분만 뜯어요. 수프를 뜯어서 이 봉지에 넣는 거예요"
그이의 선배 둘은 돌아가며 지혜에게 말했다. 


그이는 자기가 만든 라면 봉지를 들고 저쪽 귀퉁이의 온수통에서 물을 받고 움켜쥔 채로 지혜에게 온다.

"지혜야, 이거 꼭 잡고 있어. 삼사 분쯤 있다가 조금 벌려서 이제 먹으면 되거든. 기가 막힌 맛이야!"


봉지라면을 처음 본 지혜는 만드는 과정이 마냥 신기해서 그이를 몇 번이나 바라본다.
어둑한 밤, 구름에 떠 있는 발. 랜턴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이만을 기대어 두어 시간 산행 후 먹은 봉지라면 두어 젓가락에 노곤함이 밀려온다. 이렇게나 맛있었던가, 라면이.


'앉아서 잘 것인가. 서서 잘 것인가.' 

고민하던 지혜를 세 사람은 놀린다. 저쪽은 남자, 반대편은 여자. 간신히 누울 수 있는 2층 침대들이 즐비하다. 대피소라니 그저 한두 사람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전쟁이 나도 한 마을 사람들이 비상식량을 비축해 두고 몇 날이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곳.

설악산장의 가을밤. 지혜는 왜 설악 입구부터 그리 긴장했던가!


귤 그릇을 만들어와서 불쑥 내미는 그이는 소주를 좋아한다. 아니 술을 너무 좋아한다.
선배는 지혜에게 "이 녀석이 술이 과해요. 다 좋은데......"
지혜는 대학로 '반저의 사과 소주'를 응용한 그이의 귤 소주를 보고는 빙긋이 웃기만 한다.


헤드랜턴을 지혜의 앞에 비춰주고, 북두칠성과 별자리를 그리며 손을 잡아준 그이와 함께한 가을밤. 

입맞춤은 없었는데 쏟아지는 별을 그 밤 지혜는 보았다.


봉지라면과 함께.


  * 산에서 취식이 되던 시절 봉지라면을 이렇게 만들어 먹기도 했답니다.
2024.05.07. 집에서 끓인 봉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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