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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기도설 Jun 14. 2024

평양냉면은 아닙니다만

10화 준비되지 않은 이별 

"지혜 씨, 괜찮아!"

붉은 장미 가지를 뒷배경으로 배치하려다 가시에 찔렸다.

오디에서 물이 배어 나오지 않도록 한 번, 면 천에 얹어서 색물이 나오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미 생크림에 빨간 오디 물이 스며 들었다. 지혜의 찔린 손가락에서도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제 실수여요. 다시 세팅할게요"

"잠깐 멈춰요. 그만, 내가 생각을 다시 해보고 할 테니 오늘 작업은 멈추자"


심 선생은 지혜를 나무라지 않고 사무실로 불렀다.

"지난달 웨딩케이크 반응이 좋았는데, 지혜 씨가 이번엔 안 하는 게 낫겠어! 다른 사람 다른 컨셉으로 넘겨야 할 것 같아! "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눈병이 났다고 해도 믿겠어!"

심 선생은 나비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지혜에게 건넨다. 지혜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사랑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다정한 사람이 말을 멈췄을 땐 기다려야지 어쩔 거야! 

그 사람이 더 아플 수도 있어. 믿고 기다려요!


"휴가를 줄 테니 좀 쉬고 와요."

심 선생은 회식 때면 '지혜는 내 은퇴까지 같이 갈 사람이야'라고 직원들에게 말하곤 하였다. 

지혜는 스튜디오를 나와 충무로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혜의 핸드폰이 울린다. 

'어디로 가면 돼요?', '대흥동 을밀대로 오면 된다.' 

택시를 타고 기대어 가는 동안 지혜는 내내 택시 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그이는 분명 전화 신호가 가고 있음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이가 연락이 없다.

삼우제 이후 술 취한 목소리 그 한 번의 전화 이후, 한 달이 되어간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말과 다르게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 딸을 맡길 수 없다."

"지금 너 혼자 좋아서 그러는 것이 분명한 거지? 그 사람은 아닌 거야!" 

"아니라고, 출장 갔다고요."

지난밤, 지혜는 엄마에게 그이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음을 말할 수 없었다.  


그이는 자신이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맞다며 지혜의 말을 막았다. 

"동생이 몹시 아픕니다. 부모님은 결혼하면 저만 잘 살면 된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혜와 결혼해도 같이 살 생각입니다."


그이의 환한 얼굴과 씩씩하게 인사하는 첫 모습에 반갑다며 엄마가 손을 잡는 모습을 지혜는 보았다.

이내, 그이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창백하다 못해 혜숙의 얼굴은 검은 동굴 입구 같았다. 


그이를 지혜의 부모가 만나고, 이후 그이는 할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잃었다. 

지혜가 퇴근할 때마다 혜숙은 집에 일찍 오라고 독촉하곤 하였다. 그이는 출장 갔다고요. 

 

을밀대. 생긴 지 이십오 년이 넘은 평양냉면집이다. 면수가 단순하다.

우래옥보다는 면의 양이 많아 보이지만, 얇디얇은 고기 고명과 진한 육수의 맛으로 농도를 느낄 만하다. 


주전자에서 따뜻한 면수를 따르며, 치현 앞에 놔준다.
지혜는 우이동 솔밭공원 옆 그이 집 앞 '춘천막국수' 가게가 떠올랐다.

막국수를 처음으로 가르쳐준 그이. 

막국수뿐이랴! 그이가 가르쳐준 음식이 많았다.


사촌오빠인 치현은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다. 

의사가 될 법도 했으나, 오빠가 의공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지혜는 그동안 잘 몰랐다. 

병원에서 의사보다는 정기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의공학을 선택했다고 했다. 

'선희는 잘 있어? 딸, 아들 잘 크고 있어?', '엄마가 고생이 많으시지.' 

치현은 지혜 앞에 젓가락을 놔준다. 


"지혜야, 왜 뭐 잘 안되고 있어" "울었어?"

"오빠, 이렇게 물어봐서 미안해. 오빠, 선희 때문에 결혼 안 하려고 하는 거야?

오빠가 조카들 키우려고 그러는 거지!"

치현은 수저를 들지 않고, 지혜를 한참 바라본다. 

지혜가 치현이에게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말이다. 선희는 시각장애인이다. 

두 돌 무렵 열병으로 시각을 잃었다. 그저 검정 선과 하얀 물체로만 구분하는 정도라고 한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너 저번에 사귄다던 그 사람 때문이야?" 

치현은 조카들 때문이냐는 지혜의 말에 대답이 없다. 

치현은 건강하게 태어나 크고 있는 조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자식인 양 동생 모르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선희의 결혼식은 안내견 두 마리가 신랑신부를 같이 꽃길로 안내하였다. 

선희는 맹인 마사지사로 손맛이 좋은 꽤 훌륭한 마사지사로 인정받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학원 공부하라니까, 일은 재미있어?"

치현은 딴청을 부린다. 사촌오빠로 대학 입학 때부터 계절에 한 번 만나 지혜와 전시를 보러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였다. 취직할 즈음 스페인어에 능한 지혜에게 통번역대학원을 가라고 권했다. 

책 읽고, 박물관 다니기를 좋아하는 지혜의 성향을 잘 아는 편이었다. 

네 살 차이가 나는 오빠지만 직계로는 오빠가 없는 지혜가 가장 의지하는 오빠였다. 


을밀대의 냉면은 다른 평양냉면집보다도 면이 더 잘 끊어진다. 

"기다려봐? 계절이 두 번 바뀔 거 다 생각하는 것이 어때?"

"기다리면서 공부하고 있으면 어떨까?"

"그 사람도 아주 힘들겠는데, 몸이 불편하게, 특별하게 태어난 아이가 있는 집은 지혜야! 

상상할 수 없어. 너는 아기도 좋아하고, 이뻐하잖아!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식을 낳으려고 할까?"

지혜는 평양냉면의 육수를 한 수저 떠서 먹고, 또 한 수저 들이키나, 면을 먹지는 못한다. 

그이와 먹은 우이동 '춘천막국수'의 물막국수 국물보다 연하다. 




일요일 오전. 덕성여대 앞 버스 정거장. 

골목을 걸어본다. 파란 대문에서 나왔던가, 이 골목이 아니었나, 지혜는 건너편 솔밭공원 횡단보도를 건넌다. 

받기만 했던 것도 습관이었나! 

그이와 손을 잡고 그이 집 주변을 걸었을 때 더 정확히 알아두었어야 하는데, 이 골목인지 저 골목인지도 모르겠다. 


419 공원묘지 방향으로 이백 미터쯤 걷자니 그이와 같이 갔던 '춘천막국수' 가게가 보인다. 


은은하게 밍밍한 물막국수, 탄탄한 녹두전 

지혜는 그이를 못 만날 수도 있다는 티끌만 한 의심을 한 적이 없다.

사랑이 깊어서 더 깊어서 

사랑이 무거워서 

그이는 참고 있을 것이다. 


평양냉면은 아닙니다만

은은하게 담백한 물막국수 

한 수저를 지혜는 혼자 뜬다. 





photo : 2024.06.08. 을밀대 평양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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