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병원 장례식장 입구.
"오지 마, 지혜야! 인사 안 와도 괜찮아.
내가 지금 바쁘니까, 일 다 마치고 전화할게"
"오빠, 그게 아니고" 지혜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이는 전화를 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지혜 씨 아니세요?"
그이의 동기인 동혁이 아는 체를 한다.
"아, 지혜 씨 안 들어가고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죄송한데, 안에 들어가셔서 오빠한테 귀띔해 주시겠어요. 동혁 씨 부탁드려요."
그이는 뛰어나와
"미안해, 지혜야! 지금 인사드릴 상황이 아니어서"
"동혁 씨랑 들어가서 조문만 하고 갈게요. 그냥 대학 후배라고 해요."
지혜는 종이 그릇에 담긴 빨간 국물 육개장에 수저를 담그지 못했다.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며 동혁 씨가 택시를 불러 주겠다고 일어설 때, 옆 테이블의 대화가 들렸다.
"큰아들 앞세워 보내지 않으려고 정정하던 어머님이 먼저 저세상으로 가시네. 큰아들이 갑자기 아프다고 그리 걱정하시더니, 위암 말기였다잖아, 저 서른 넘은 손주 장가가는 것 보고 가시지."
그이와 지혜가 사귄 지는 겨울 봄 여름 가을을 지나 이제 새로운 겨울을 맞이한다.
두 달 전부터 부쩍 말수가 없어진 그이는 이삼 주 전부터 아예 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가 빈번하게 생기곤 했다.
웃음이 적어진 그이는
"지혜야, 너는 서울에서 태어났지. 부모님이 서울 올라오신 지 30년은 넘었다고 했지?"
"왜 자꾸 물어보는 건데요?"
반문했지만, 그이는 답하지 않았다.
그이의 집은 경상도, 지혜는 서울, 부모님이 전남 순천이 고향이다.
그이는 할머니 장례와 삼우제를 마치고 이틀이 지나서야 지혜에게 연락을 했다.
"아버지가 암이었다는 걸 왜 말 안 했어요. 집에 인사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경상도, 전라도 지역색 때문이었어요? 우리 집은 괜찮다는데, 말을 해봐요."
그이는 소주잔을 연신 비우면서도 말이 없다.
"언제까지 말 안 할 작정인지"
"지혜야, 지금은 안돼. 지금 우리가 결혼하면 너는 ..."
낮에 동혁 씨와 만나는 친구 미정이 지혜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네가 그 모든 걸 덮어쓰게 되는 거야. 그 결혼을 왜 해.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와서 초상을 두 번 치르면 사람 잘못 들어왔다며 너를 너로 보지 않아."
"지혜, 너를 정말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미정이는 말을 흐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집에서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라고 전라도 며느리 정말 싫고 안된다 했다더라. 강경하게 허락 못 한다는 것 같아."
굵은 미정이의 음성이 마치 그이의 아버지가 말하는 듯 지혜의 귀에 울린다.
'착한 아들이 결혼할 사람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다잖아. 그 사람, 효자잖아'
그이는 일요일 점심을 같이 먹고 있다가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이 굳은 채로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미안해! 아버지 중환자실로 옮기셨대!"
그대로 급히 뛰어간 그 사람. 그이.
지혜의 그이.
미정이가 "지혜야, 너 소식 못 들은 것 같아서 전화했어. 내일이 발인이래, 조문 가지 마라 "
전화기 너머 소리는 아득하게 울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이 되지도 않았다.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전화를 연신 했지만, 그이는 응답이 없었다.
아버지의 49재를 지내고서야 만취한 전화 목소리로 그이는
"지혜야, 지혜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지혜는 조문을 갔어야 했다.
사랑하는 줄도 모르고 사랑만 받았던 지혜는 그이의 사랑에 예의를 갖추었어야 했다.
만난 적 없는 아버지의 죽음과 떠나보내야만 했던 인연의 시간 차이에
멈추지 않았던 눈물. 눈물.
장례식장에서 먹지 못한 육개장의 매운 국물.
멀리서라도 가시는 길 인사를 드렸어야 했다.
지혜가 만난 적 없는 아버지께. 그이에게.
빨간 눈물이 흐른다.
photo : 2024.06.06. 끓인 육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