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재밌게 놀 다 올 수 있는 휴양지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인도는, 대부분 더러운 곳이 많고 여행하기에 굉장히 불편하며, 크고 작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여행하기 쉬운 나라가 아닙니다. 저 또한 인도에 여자 혼자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꼭 가고 싶었던 이유는 첫째로, 대학생 때 봉사활동으로 다녀왔었던 그때의 좋았던 추억을 다시 꺼내 보고 싶었고, 둘째는 세계여행이 라는 긴 여정 중에 여행하기 쉽지 않은 나라에서 역동적인 여행에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도 입국 전부터 필요한 기차 구간은 비교적 안전한 3A 칸으로 모두 사전에 예매했고, 지역 이동을 할 때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가격대가 좀 있으며 편하고 안전한 볼보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혹시 몰라, 위험한 상황에 놓일까 봐 항상 재킷 안 주머니에는 과도 칼을 넣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네팔 공항으로 넘어갈 때 과도 칼이 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출국 심사를 하다가 걸려서 과일 깎는 용도로 가지고 다닌 거라고 둘러대고 간신히 통과한 적도 있습니다.
현지 호스텔도 못 미더워서 세계여행 준비 6개월 전부터 '헬로우톡' 이라는 언어교환 앱을 통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인도 여자 사람들'과 친구 관계를 쌓아왔습니다. 델리에서 만났던 스와띠는 인도에서 한국어를 구사하며 농협 델리지사에서 일하던 친구였고 우다이푸르의 바이샬리는 한국 드라마나 아이돌을 좋아하여 춤을 추거나 한국어를 독학하고 있던 우다이푸르 대학생이었습니다. 뭄바이에서 만났던 앙키타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대학생이었는데 종종 영상통화를 하면서 가족들과도 서로 인사를 나누며 앱을 통해 친해진 친구입니다. 저는 이 친구들을 최소 4개월에서 6개월간 서로 연락을 하면서 지냈고 제가 인도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흔쾌히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준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도시를 이동할 때는 해당 도시에 관해 세세한 것들까지 알아보고 공부를 한 후 이동을 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 먹지 말라는 것, 가지 말라는 것은 조금만 검색해 보시면 아주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도에는 국민 루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여행 도시들이 있습니다. 국민 루트를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보통 여행경로가 다들 겹치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국민 루트로 여행을 할 시, 수많은 외국인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갔던 자이살메르만 하더라도 '포티야', '가지네', '원빈네' 같이 알려진 사파리 회사를 가면 인도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은 현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딜 가도 100%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인도라서 위험한 게 아니라 어디든 조심해서 안전하게 다녀야 합니다.
델리에서 자이살메르까지 이동하는 18시간은 천국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워서 가는 기차를 탔기 때문이다. 인도 기차에는 좌석 유형별, 좌석 위치별로 명칭이 다르고, 좌석 등급에 따라 가격도 큰 차이가 있다. 알아본 결과 가장 낮은 등급의 저렴한 칸은 안전과 위생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안전하게 중간 등급인 3A 칸으로 전부 사전 인터넷 예약을 해 두었다. 기차 내 성추행과 도난사건을 걱정하며 18시간을 가야 했다면 그것은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3A보다 낮은 등급의 칸에는 잡상인들이 기내로 들어와 큰 소리로 음식을 판매하는데 시장통이 따로 없으며 내가 예약한 자리에 이미 다른 승객들이 앉아있어 눕지도 못하고 내 자리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있는 3A 이상의 칸에는 잡상인들이 잘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비교적 깨끗하고 안전하다. 3A 칸은 우리나라 일반 열차 가격보다도 저렴하고 손님들의 옷차림만 봐도 말끔하고 대부분 제정신인 사람들로 보인다.
도착 예정 시간에서 50분가량 지연되어 오전 10시쯤 자이살메르 역에 내렸다. 미리 카카오톡으로 예매해 두었던 원빈 사파리 사장 '원빈'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빈은 내가 50분이나 늦게 도착했는데도 항상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안녕하세요' 한국어로 인사하는 원빈을 보아하니 그동안 나 같은 한국인 손님이 꽤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름이 원빈인 이유는 그동안 이곳을 방문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칭찬하며 원빈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숙소 도착 4시간 뒤에 사파리 투어 일정에 바로 참여했는데 내가 자이살메르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사막 체험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굳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참고로 기차에서 발 뻗고 편하게 잠을 많이 자서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다. 이번 사막 체험에는 나 이외에도 한국인 부자지간, 한국인 남자 그리고 미국인 남자 한 명, 이렇게 총 다섯 명이 함께했다. 출발 예정 시간에 맞춰 우선 지프를 타고 1시간가량 이동했고 그곳에서 낙타로 갈아탔다. 말을 타본 적은 있어도 낙타를 타는 것은 처음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낙타 등 뒤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낙타가 구부렸던 다리를 펴면서 일어나는데 생각보다 너무 높아서 만약에 떨어지면 최소한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낙타 등에 있는 물혹 두 개 사이에는 안장이 놓여 있었고 따로 잡을 만한 고삐가 없었기 때문에 사파리 직원들이 만들어놓은 작은 손잡이에 의존에서 타야 했다. 낙타를 타고 1시간 정도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사막다운 사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사막에서 살아남기'라는 책을 읽고 내가 사막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것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사막에 도착해 낙타에서 내리자마자 함께 사파리에 참여한 한국인 남자와 함께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해가 저물고 사파리 직원들이 저녁 먹을 시간이라며 우리를 불렀다. 제공되는 카레와 밥은 내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아서 이렇게 오늘 저녁은 걸러야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것이 끝이 아니라 치킨 바비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 핀 장작 아래에 포일로 싼 치킨을 넣어 굽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해가 지면서 어둠이 사막에 내려앉자,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당시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미국인 아저씨랑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당시 우리들의 영어가 너무 미천한 수준이라 미국인 아저씨는 외롭게 밥만 먹고 바로 주무시러 텐트에 들어가셨다. 밤은 깊어가고 모닥불이 점점 수그러들자 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고 주변에 있는 온갖 나뭇가지를 주워오면서 사막에 왜 나무가 있지 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꺼지지 않는 불을 지피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인도에 있는 건지, 정말 사막에 있는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지 탐사대 중국 어딘가에서 불을 피워 놓고 팀원들과 이렇게 둘러앉았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6년 뒤 또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인도 사막에 있을 줄 말이다.
추운 새벽 동안 한국에서 가져온 침낭 덕분에 춥지 않게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민 밤새 사막 바퀴벌레들이 모레 밖으로 다 기어 올라와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매우 징그러운 풍경을 마주해야 했다. 때는 바야흐로 내가 10살 때. 아래층 아주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아주머니가 먹으라며 '뻥이요'라는 과자를 주셨는데 그 과자를 들고 어머니와 함께 결혼식장 가는 택시 올라탔다. 택시 안에서 '뻥이요'를 열심히 먹던 중 과자 하나가 어금니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자, 혓바닥으로 과자를 살짝 밀어내서 씹어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입안에서 뭔가가 막 돌아다니는 탓에 당황에서 '퉤!'하고 뱉었더니 다름 아닌 바퀴벌레였다. 왜 바퀴벌레가 과자에 들어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에서 튕겨 나온 바퀴벌레를 어머니가 발로 밟아 죽였고 그때의 트라우마로 지금까지도 작은 개미나 모기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벌레 공포증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날 아침 사막에서 눈을 뜬 나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아 얼른 짐을 챙겨 지프차에 첫 번째로 올라탔다.
전날, 사막에서 자느라 씻지 못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찝찝했다. 그리곤 숙소에 착하자마자 샤워를 후 한식을 판다는 '포티야'로 천천히 걸어갔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한식을 만나서 그런지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또 혼자 밥을 먹고 있는 한국인 남자가 있어 괜히 반가워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세요? 혼자 오셨어요?"
"네, 혼자 여행하고 있어요."
"아 그러세요, 인도 다음은 어디로 가세요?"
"저는 다합에서 왔는데 다시 다합으로 가려고요."
"네? 다합이 어딘데 갔던 곳을 다시 가요?"
"이집트에 있는 도시인데 세계 여행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거쳐 가는 곳이에요. 이집트는 안 가세요?"
"아, 제가 이집트에는 혼자 가기가 좀 무서워서 일부러 뺐거든요."
"아, 그래요? 다합 진짜 좋은데, "
라며 다합 가는 일정이 없다니 너무 아쉽다는 그 남자의 반응에 괜히 혼자 겸연쩍었다. 이집트에 혼자 여행 가기 무섭다는 여자가 인도에 혼자 와서 이렇게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색하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주변을 배회하다가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다합'이라는 곳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나라, 물가가 싸고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나라'라는 사람들의 글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 인도도 혼자 와서 여행하는데, 이집트라고 못할 게 뭐야'라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일정을 수정하여 네팔 다음 이집트로 넘어가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자이살메르 일정이 끝난 후 조드푸르에 기차역에 내려 미리 예약한 숙소까지 15분을 걸어서 도착했다. 광장 안에 있는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숙소는 대체적으로 비싸기도 하고 기차역에서 툭툭이를 타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역 근처 호스텔로 정한 것이었다. 간판이 따로 없어 여기가 맞나 의아해하며 계단을 타고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데 건물 자체에 불이 다 꺼져있고, 어디서 불어오는 건지 모르게 세차게 부는 바람 탓에 덜컹거리는 문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낯선 남자가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만 같고, 내가 올라온 계단으로 누군가 따라 올라오면 어쩌나 걱정하며 괜히 여기로 숙소를 잡았다고 백만 번을 후회했다. 밖에서는 간판이 없어 몰랐는데 3층까지 올라와 보니 다행히 호스텔 이름 적힌 문을 발견한 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호스텔 내부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계산대에 비치된 전화기로 직원을 호출했다. 직원은 금방 오겠다고 했지만 15분이 지나서야 얼굴을 드러냈다. 그 남자는 나의 여권을 확인한 후 바로 앞에 보이는 방으로 안내해주었고 그렇게 아무도 없는 4인 공용 침실 방을 혼자 사용하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이를 닦을 때도 생수 물을 사서 닦으라는 이야기가 있다. 수질이 좋지 않아 음식을 잘 가려 먹어도 수돗물로 이를 닦으면 그 물 때문에 배탈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을 사러 다시 그 무서운 계단을 내려갔다 돌아와야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배낭 가방에 남아있던 생수로 이를 닦고 약한 수압으로 간신히 샤워 재개까지 마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호스텔에 혼자 있자니 기분이 묘하고 이상했다. 누군가가 내 방으로 쳐들어오진 않을까 걱정하다가 귀중품을 챙겨 서둘러 광장으로 나갔다. 숙소 앞에서 툭툭이 택시 하나를 잡은 후 광장까지 가는데 얼마냐 물었고 툭툭이 기사는 내게 300루피를 달라고 했다.
"what?? 300???"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지만, 기사는 단호했다. 광장 안에 있는 호스텔들이 조금 비싸서 기차역 근처 저렴한 곳으로 잡았던 것인데, 내가 잡은 호스텔에서 광장을 왕복하는 '툭툭이'에 나의 하루 숙박료보다 훨씬 비싼 값을 지급해야 하는 참사를 겪게 된 것이다. 숙소 하루 숙박비가 250루피였는데 택시비가 300이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숙소에만 있을 수 없어 가격 흥정 끝에 250루피를 내고 탑승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지인들 상대로 하면 50루피도 받지 않는 거리인데 나 같은 관광객이나 외국인들에게는 가격을 뻥튀기해서 부른다고 한다. 델리나 자이살메르에서 '툭툭이'를 타볼 일이 없었기에 그 전에는 인도의 흔한 사기 유형에 대처할 기회가 없었기에 눈뜨고 코가 베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오는 툭툭이는 150루피로 깎아서 올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심지어 사기 유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 더 사기를 당해야 했다. 툭툭이 기사들이 저렴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도착지에 가서는 모르는 척을 하거나, 이동 중간에 툭툭이 기사가 갑자기 차에 문제가 생겨서 가격은 흥정가 그대로 해줄 테니 옆 차로 갈아타라고 한 후 역시나 도착해 보면 기사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런 일이 너무 잦아서 피로감을 느끼는 관광객이 많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지만 누구 하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일 따위는 없다. 왜냐면 도난이나 협박 사건도 많으므로 사기 좀 쳐서 택시비 더 받는 것은 이들에겐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신고해 봤자 경찰은 당연히 나서 주지 않고, 그러니 이를 신고하는 사람도 없다. 그냥 본인이 알아서 가격 흥정하고 소지품 잘 챙기면서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며 다니는 수밖엔 없다.
조드푸르는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집이 많아 파랑 도시라고 불리며 영화 '김종욱 찾기'의 배경이 된 곳이라 유명해진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조드푸르에 방문한 큰 이유는 바로 '홀리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2월 말, 3월 초 (매년 상이) 인도 전역에서 행해지는 봄맞이 축제로, 온 거리가 형형색색 물드는 '색채의 축제'라고 불린다. 홀리 축제는 힌두교 축제의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인 선이 악을 물리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훌리건의 전야제 격으로 펼쳐지는 홀리나 태우기로 구현되는데 훌리건 하는 '훌리건'이라는 축제 명칭에서 기원이 됐다고 전해지는 신화 속 마녀다. 훌리건 전날 밤 짚으로 만든 훌리건 카를 불태워 선이 악을 몰아냈음을 축하하고 다음 날 열릴 축제에 흥을 돋는다고 한다.
지나가는 아무 사람에게 '해피 홀리(Happy Holi)!'라고 말하며 얼굴에 물감을 묻히는 것이 기본적인 인사다. 델리나 다른 대도시에서는 축제 열기가 너무 과해져서 성추행이나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나마 안전하게 축제를 즐긴다는 조드푸르로 온 것이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 대여섯 명이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을 통해 축제 당일 조드푸르 광장에 모여 함께 축제를 즐겼다. 우리는 일단 광장 주변에 있는 상점들에서 축제에 사용할 색채 가루들을 산 후, 사람이 많은 광장 중심보다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들 쭈뼛거리고 있는데 어느 골목에서 인도 꼬마 여자아이들 4~5명이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자기 집으로 들어와서 같이 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순간 고민하다가 여자아이들이고 별일 있겠냐 싶어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너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며 인도의 전통 차 '짜이'를 먼저 대접해 주었다. 외국인이 신기했는지 우리에게 인도 전통 옷도 입어보라고 하고 손에 직접 해나도 그려준 후 옥상에 올라가 서로 색채 가루와 물을 뿌리며 정신없이 놀았다.
한참을 놀고 장소를 이동하려고 집을 나서는 순간, 우리와 함께 놀았던 한국인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자신의 지갑이 없어졌다고 했다. 재밌게 같이 놀았던 인도 여자아이들도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이 훔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하면서 당황해했다. 알고 보니 지갑이 들어있던 가방을 거실 소파에 두고 옥상에 올라갔고, 우리가 없는 틈을 타 골목을 지나다니던 아이들이 창문을 통해 소파 위에 있는 가방 속 지갑에 손을 댄 것이었다. 지갑 안에는 방금 은행에서 찾은 15만 원 상당의 현금과 한국에서 가져온 체크카드가 들어있었다. 그 친구는 자기 책임이라며 괜찮다 애써 웃음 지어 보였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드푸르의 추억은 신나게 놀고 지갑 잃어버린 이야기로 슬프게 마무리되었다.
홀리 축제를 마치고 우다이푸르로 향했다. '헬로우 톡'을 통해 알게 된 인도인 바이샬리의 대학교 기숙사에서 5일 동안 머물 예정이었다. 우다이푸르로 이동할 때 심야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아침 해가 뜰 시간인 6시쯤 도착 예정이라던 버스가 새벽 5시에 도착해버렸다. 그동안 밤에는 위험해서 최대한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이른 새벽에 도착해서 늦은 밤에 나온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인도의 기차나 버스는 연착과 지연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오히려 늦지 않고 일찍 도착할 수도 있겠다는 시나리오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가 이동하는 것도 딱히 안전할 것 같진 않아서, 일단 우버 택시를 불렀다. 그리곤 친구가 있는 대학교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면서 여기로 가 달라고 말했고 택시는 대학교 이름이 적힌 큰 바윗덩어리 앞에서 멈춰 섰다. 그 택시 기사에게 부탁하여 정문으로 가 달라고 말을 해야 했는데 바보처럼 바윗덩어리에 새겨진 학교 이름을 보고 여기가 맞다며 내려버렸다. 택시에서 내리자 주변엔 온통 굴착기와 가득 쌓아 올려진 모래 더미뿐이었다. 후문으로 보이는 이곳은 주변에 불빛 하나 없이 어두 캄캄해서 누가 살인을 저질러도 아무도 모를만한 그런 으스한 장소였다. 학교에 도착하면 전화하라는 친구의 말대로 미친 듯이 전화기를 붙잡고 친구가 마중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10통 이상 전화를 해도 친구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그 어두운 곳에서 혼자 계속 서 있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빛 한점, 인적,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그곳을 걷기 시작했다. '아씨, 왜 전화를 안 받아, 아씨, 아씨, 아씨, 왜 전화를 안 받아!' 혼잣말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공포체험은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걸어 대문까지 걸어가는데 10분도 안 걸린 시간이 나에겐 마치 십 년이 걸린 것 같았다. 경비원 아저씨도 없이 닫혀있는 게이트에 당황해서 문을 부여잡고 그 앞에 서서 안에 사람이 나타나 주길 기다렸다. 마침 지나가는 인도인 남학생 두 명을 붙잡고 다짜고짜 친구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이밀며 나의 짧은 영어로 친구를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I'm here for meeting my friend, Do you know Vishaly?"
한국으로 치면 막무가내로 이 학교의 민주를 만나러 왔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인도인 남학생들은 친절하게도 내가 알려준 바이샬리의 전화번호를 본인들의 핸드폰에 검색하기도 하고 친구의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마침내 내 친구 바이샬리를 찾아주었다. 그들은 나를 여자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새벽 5시 40분경, 드디어 바이샬리 기숙사 방 앞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자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바이샬리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도착하면 전화를 해서 깨우라던 친구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깨우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버린 듯했다. 바이샬리는 일단 너무 시간이 이르니, 잠부터 자자고 말하면서 본인의 일인용 침대를 내주었고 자신은 바닥에서 자겠다며 얇은 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침대에서 자는 건 아닌 듯하여, 침낭이 있어서 내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새벽 공포체험이 지나고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일단 잠을 청하며 위험했던 우다이푸르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이샬리가 다니는 그 대학교는 새로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신설 학교였고 학교 규모가 워낙 커서 아직도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곳이 많다고 한다. 내가 갔던 후문은 공사가 한참 더딘 곳 중 하나였고 나는 그런 인적 없는 공사장을 가로질러 홀로 어둠을 뚫고 걸었던 것이다. 그건 정말 내 인생에서 두 번은 없을 공포체험이었다.
우다이푸르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도 많고 경치가 좋아서 어딜 가든 차 한잔하거나 책 읽기에 좋았다. 낮에는 우다이푸르 도시를 구경하고 해 질 무렵에는 버스를 타고 친구 기숙사까지 들어간 후 친구와 함께 기숙사에서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루는 바이샬리가 대학교 졸업파티에 나를 초대해주었는데 우리나라 대학교 축제나 연말 시상식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턱시도와 드레스로 쫙 빼입고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놀라웠던 점은 파티 MC나 파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시종일관 영어를 쓴다는 것이었다. 인도의 공용어가 힌디어와 영어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영어를 많이 쓸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들끼리 있을 때도 힌디보다는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워낙 인구가 많고 땅도 넓어서 쓰는 언어가 지역마다 다르고 심지어 같은 인도 사람이라도 쓰는 언어가 달라서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나름 공식적인 자리에서 영어는 필수 불가결한 언어인셈이다.
우다이푸르를 떠나 고아를 지나 함피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산처럼 여기저기 쌓여있는 도시였는데, 해 질 녘 바위를 타고 정상까지 가면 함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일몰 포인트가 있다. 함피는 마을 중간이 강으로 나뉘는데, 이동수단은 작은 통통배 하나와 덜 작은 배 한 척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배 한 척에 사람이 어느 정도 차야 출발을 하고, 저녁 6시 이후에는 운행하지 않아 강을 건널 때는 항상 시간 계산을 잘해야 했다. 숙소가 몰려 있는 곳과 오토바이를 빌려서 돌아다닐 만한 곳이 강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모든 여행객들은 한 번쯤 반드시 배를 타고 강을 건어야만 했다. 한 번은 6시 10분 전에 배를 타러 도착했는데 타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운행이 마감된 적이 있다. 아니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다시 숙소로 돌아가라는 거냐고 항의했지만 뱃사공은 우리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나 이외에도 6시 마지막 배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뱃사공은 모두를 가볍게 무시하고 느긋이 앉아있기만 할 뿐이었다. 늦게 온 사람들까지 모아 인원이 찼으니 출발하자고 누군가 화를 내며 말하자 뱃사공은 6시가 넘었으니 돈을 두 배로 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 모두 분노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그 배를 타지 못하면 숙소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두 배로 돈을 더 내고 타야 했다. 내 앞에 앉은 미국인 여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얼굴이 시뻘게져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뱃사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루는 호스텔에서 만난 범철이라는 한국인 친구와 함께 강을 건너 오토바이 한 대를 빌렸다. 둘이 신나게 오토바이를 타며 이곳저곳을 누비다가 어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낯선 외국인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기하고 반가운지 소리를 지르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렇게 사진도 찍고 아이들과 함께 놀던 중, 학교 선생님 두 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공부할 여건이 좋지 않다며 우리에게 연필을 살 돈을 좀 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사실 연필 한두 자루 정도 사서 주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우리가 한두 명의 아이만 선물해 줄 수도 없었고 또 그렇다고 전교생 모두에게 연필을 모두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죄송하다고 말한 후 학교를 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곤 한편으로는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인도에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한 아이들은 공부할 연필 한 자루가 없이 지내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새삼 인도의 빈부 격차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범철이가 먼저 함피를 떠나고 홀로 남은 숙소에는 일본인 남자가 새로 들어왔다. 나보다 훨씬 어렸지만, 말과 행동이 성숙했고 착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종종 같이 밖에 나가기도 하면서 가까워졌는데 하루는 이 친구가 호스텔 밖에서 술을 마신 후 숙소에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오늘 하루 어땠냐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했는데 술에 취해서였는지 이 친구는 일본군 위안부 사건에 대해 일본에서 이미 한국에 금전 배상을 했는데 왜 그걸 가지고 아직도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한 사과가 중요한 것이라고 대답해주면서도 태어나서 일본인과 역사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을 상상도 못 했기에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도중 이 친구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더니 이번에는 한국인 여자들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며 뜬금없이 자신이 했던 호주 여행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가 호주에서 이제 갓 20살 된 한국인 여자를 만났는데 같이 밤을 보낼 때 그 여자아이가 굉장히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나한테 한국인은 원래 이렇게 다 부끄러움이 많냐고 물어봤고 나는 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곤 바로 졸리다고 말한 후 방 불을 끈 후 내 침대로 돌아갔다. 빛의 속도로 철벽 차단하는 나의 솜씨에 꽤 당황했을 것이다.
며칠 뒤, 즐거웠던 함피를 뒤로하고 인도의 경제도시 뭄바이로 향했다. 뭄바이 역시 '헬로우 톡'에서 만난 언어교환 친구 앙기타의 집에서 나흘 동안 머무를 예정이었다. 친구는 깔끔하고 넓은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어렵지 않게 가난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구멍 난 콘크리트 공간에 이불 두 개를 펼쳐놓고 지내는 사람들도 본 적이 있다. 뭄바이에 유명한 빨래터에 가면 온종일 빨래를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누구는 대학교에 다니며,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을 때, 누구는 학교에서 공부할 돈이 없어 연필 한 자루 살 여력이 안 되고 또 누군가는 온종일 손으로 빨래를 해서 돈을 벌고 집이 없어 빨래터 내부 작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살아야 하는 대조적인 모습들에 마음이 아팠다.
마침내 인도 마지막 도시 방갈로에 도착했다. 사실 8년 전에 방갈로 지역에 봉사활동을 위해 온 적이 있다. 8년 전, 내가 갓 20살이 되었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왔던 곳이 인도 방갈로였다. 마이소르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페인트칠도 하고 나무도 심어주고, 아이들 위생교육, 영어교육 등 봉사활동을 했었다. 불빛이 아름다운 마이소르 궁전 앞에서 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 인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과일만 먹고살았던 그때, 택시는 꿈도 못 꾸고 맨발로 걸어서 숙소와 학교를 오갈 때, 찜통더위에 길바닥에 주저앉았을 때를 상기하며 다시 찾은 방갈로가 너무나 반가웠다. 8년 만에 다시 찾은 방갈로는 더 깨끗하게 발전되어 있었고 그리운 추억들을 따라 방갈로의 지역 음식들을 맛보고 사원 방문을 하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이렇게 하나의 나라 안에 다양한 풍경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의 나라 안에 사막 도시, 돌덩이로 둘러싸인 도시, 핑크 도시, 파랑 도시 그리고 각종 아름다운 바다와 산까지 있다. 여행하면서 화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경, 좋은 사람들이 인도를 욕하면서도 또다시 찾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은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은 분명 불행할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인도 여행을 통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고 남과 비교하는 삶이 아닌,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내가 수시로 마시는 공기와 물이 얼마나 맛있고 깨끗한지 그 감사함 또한 배웠다. 인도에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들은 많아도 인도에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