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던 스페인 여행 중 다합에서 룸메이트로 친해진 하영 언니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오스트리아에 사는 언니는 내게 유럽 여행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고 당연히 YES라고 답한 후 언니를 만나기 위해 스페인에서 급하게 폴란드로 가는 비행기를 예매했다. 하영 언니는 나보다 9살이 많고 오스트리아에서는 7년째 살고 있다. 첫인상은 차가웠지만, 서로의 웃음코드가 잘 맞았고 같이 지내는 날이 많아질수록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장난도 치며 우리는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이집트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헤어진 지 정확히 한 달 만에 다시 언니를 만났다. 폴란드를 지나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모기 밥이 되는 수모를 겪으며 사랑의 터널까지 함께 다녀온 후 루마니아의 클루지나포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언어교환 앱으로 알게 된 루마니아 친구 집에서 머물기로 해서 도착한 라헤의 집. 루마니아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라헤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라헤 집 주변에 있는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주문했다. 언니는 피자가 오기 전에 빨리 씻고 나오겠다며 세면도구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는 라헤와 수다를 마저 떨고 있었다. 얼마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오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언니?"
"샤워할 때 조심해, 바닥에 배수가 잘 안 되네"
"네, 언니"
바닥에 물이 잘 안 빠진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우리는 피자를 다 같이 나눠 먹으며 저녁 식사를 마쳤고 그러는 사이에 언니가 해줬던 말은 이미 까먹은 지 오래였다. 피자를 다 먹은 후 세면도구를 챙겨서 화장실로 들어가서 옷을 벗어 변기 뚜껑 위에 올려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샤워를 마친 후 문에 걸려있는 수건을 가지러 욕조에서 나오려 바닥을 내려 본 순간! 깜짝 놀라 배수가 안 된다는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욕조 안에서 샤워를 했지만, 배수가 안 되는지 물이 역류하여 화장실 바닥은 마치 홍수가 난 것처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물이 하수구에서 역류해 나온 탓에 온갖 이물질들이 바닥에 둥둥 떠다녔고 그 순간, 깨끗하게 씻은 내 발을 더러운 물속에 담그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결과 황당하게도 점프를 해서 물을 밟지 않고 수건이 있는 문 쪽으로 가야겠다 결정한 후 왼손은 세면대를, 오른손으로는 우측 벽에 달린 고리를 잡고 욕조에서 뛰어올랐다. 참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당 당당 탕 꽝꽝 쨍그랑 꽝꽝' 엄청난 굉음이 났다. 소리에 놀란 언니와 라헤가 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밖에서 소리를 치며 문을 열려고 하자, 다급히 문고리를 부여잡고
"잠시만요! 지금 문 열지 마세요!"
라고 외쳤다. 일전에 손을 씻으려고 물을 틀 때도 세면대가 조금씩 흔들렸던 것이 떠올랐다. 세면대가 오래되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 않아 불안 불안 하긴 했지만 나의 몸무게 정도는 버텨줄 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세면대를 잡고 힘차게 날아오르자, 헐렁거리던 세면대가 내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뛰어오른 순간 세면대가 벽에서 분리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대로 나도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하여 이물질로 가득했던 그 더러운 물에, 발이 아닌 전신을 담그는 참사가 벌어졌다. 더 큰 문제는 세면대가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산산조각 깨져버렸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멍하니 쓰러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지금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머리로 입력이 안 되고 있었다. 동시에 무슨 일이냐고 소리치며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언니와 라헤의 목소리에, 나체로 있던 나는 다급히 문고리를 부여잡은 것이다. 2분간 그대로 서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여전히 헤매는 중에 일단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수건으로 대충 몸에 있는 물기를 닦던 중, 무릎 왼쪽이 조금 긁혀 피가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크게 다진 것 같지 않아 대충 수건으로 닦은 후 잠옷을 입었고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화장실 바닥에 벌어진 광경은 이루 뭐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언니와 라헤도 놀라서 순간 정지화면처럼 굳어있다가 언니는 내게 다친 곳이 없냐고 물었다.
"너 다리에 피 나!"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다시 쳐다보니 무릎에서 나오는 피가 흥건히 옷을 적시며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너무 많은 피가 흐르고 있어 나도 놀랐다. 피의 진원지는 왼쪽 무릎이었다. 세면대와 함께 넘어지면서 날카롭게 깨진 세면대 유리가 왼쪽 무릎을 찢어서 베어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다행히 크게 찢어진 것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그냥 긁힌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휴지로 피를 막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라헤가 소독약과 가재를 갖다 주었고 가재로 상처를 덮은 후 수건으로 돌돌 말아 지혈에 들어갔다. 다친 줄도 모르고 아무 느낌도 없었다. 넘어지는 순간 세면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놓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살다 살다 친구 집 세면대를 깨부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혈하면서도 실성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언니는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고 말하면서 갑자기 터진 나의 웃음에 라헤와 같이 우리 셋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순간적으로 이 상황을 기억하고 싶어 지혈한 다리를 끌고 화장실로 다시 가서 사진을 찍었다. 언니는 내게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날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사고 현장의 참담함을 다시금 떠올린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깨진 유리가 무릎이 아니라 다른 곳을 찌르거나 베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언니가 했던 경고를 가볍게 여겼다. 둘째로, 흔들리는 세면대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넘어질 수도 있다는 확률을 고려하지 않았다. 셋째로, 미끄러운 화장실 욕조에서 뛰어내려야겠다는 멍청한 발상을 했다. 30년 가까이 살면서 이렇게 당황했던 적은 처음이다. '당황스럽다' '황당하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그 날의 사고는 다음 날 마트에 가서 새 세면대를 사서 배달비, 청소비, 설치비까지 지급하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 그날 사건으로 여행뿐 아니라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머리에 각인시켰다. 화장실이나 물기가 있는 곳 어디서든 절대 뛰거나 장난치면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인 줄 알면서도 몸으로 배우기 전까지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부주의와 어리석은 생각이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잘못하면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겪은 후에야 안전에 더욱 유의하며 여행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