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중심가에 있는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헬로우 톡'으로 알게 된 터키인, 엘리프(Elif)와 2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초행길이라 길을 헤매고 다녀서 약속한 시각보다 무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Hi, Elif! I'm so sorry, I'm late"
"안녕하세요, 아이 괜찮아요. 만나서 반가워요."
영어로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이, 괜찮아요'라며 구수하게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 그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친구의 발음이 예사가 아니었다.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해야 믿을만한 수준이었다. 이름은 엘리프(Elif), 올해 대학교 2학년으로 심리학, 영어 통번역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다. 터키에서 열린 한국어 말하기 대회 1등이라는 수상 경력을 갖고 있으며 외국어와 세계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똑똑한 친구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 터키 종교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겠다고 해서 성립된 만남, 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아야 소피아 박물관과 술탄 아흐멧 박물관, 블루 모스크를 함께 방문했고 엘리프는 한국어로 설명해주는 것을 자처했다. 한국에 한 번도 와 본 적 없다는 엘리프의 한국어는 들을수록 놀라웠다.
"한국어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거야?"
"아니야, 나는 독학으로 열심히 했어."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말한 주제는 뭐였어?"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칠전팔기??"
"응 제목이 신박하지?"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나의 두 귀를 의심했다. 엘리프는 사자성어뿐 아니라 한국 속담에도 능했고 한국에서 쓰는 신조어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엑소나 BTS가 아니라 산울림이라고 했다.
"나는 산울림 노래가 좋아 너의 의미나 회상,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런 노래들 너무 좋아"
심지어 나도 모르는 노래들을 행복한 표정으로 좋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이 아이가 너무나 신기했다. 엘리프는 한국어를 4년째 공부해오고 있다고 말하면서 고향인 앙카라 한국 문화원을 다니거나 혼자 책을 사서 문법을 배우거나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듣기와 말하기를 익혔다고 한다.
“언니, 찍는다~. 하나 둘 셋! 김치~!”
내 사진을 찍어줄 때마다 히잡을 쓴 외국인이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말을 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래서 '김치~!'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항상 웃음이 터져, 엘리프가 나를 찍어준 사진을 보면 유독 웃는 사진이 많다. 박물관에서 그녀는 역사적인 견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나에게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뽐내며 설명해주었다. 그저 외국어를 잘 구사하는 것과 자기 나라 역사를 외국어로 잘 설명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전쟁, 그리고 30여 명의 왕들에 대한 업적에 대해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수준급의 어휘들을 구사하는 그녀에게 '비정상회담'이라는 한국 TV 프로그램에 출연해보라고 권유해 보았지만 엘리프는 아직 잘 못해서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며 겸손하게 답하곤 했다. 이건 마치 전교 1등이 '난 아직 전국 1등이 아니라서 잘 못 해'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한국어가 완벽에 가까운 수준의 외국인은 처음이다. 단순히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행동도 한국인이었는데, 칭찬에 부끄러워하고 일단 겸손하게 말하는 화법까지. '솔직히 말해, 너 사실 한국인지?'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같이 있는 와중에도 기도할 시간이 되면 기도실이든, 모스크에서든 잊지 않고 기도를 드리는 걸 보고서야 '아, 한국인은 아니구나'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블루 모스크에 입장하려면 긴 바지 혹은 긴치마를 입어야 하며 히잡은 필수다. 모스크에서 무료로 대여해주는 히잡을 혼자 써 보겠다고 머리와 얼굴에 돌돌 싸매고 있는데 그 모습이 답답해 보였는지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의 히잡을 바로 잡아주셨다. 내부로 들어가니 여행객뿐 아니라 실제로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속에서 나도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알라신께 인사를 드렸다. 세상에 있는 신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그래 왔듯 앞으로도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만 여행을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옆에 있던 엘리프를 보니 날씨가 꽤 더웠는데 히잡을 쓰고도 덥다고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문득 여성들만 히잡을 쓰는 것이 불편하거나 불공평하게 느껴지지 않냐고 질문했다. 대답은 마치 정해진 답을 보고 읽는 것처럼 정확하고 빨랐다.
"한 번도 불편하거나 불공평하게 느껴본 적이 없어,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목부터 발까지 피부가 드러나는 옷을 입으면 안 되고, 의상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방식을 다르게 할 뿐, 지켜야 할 종교적 윤리가 다 있으니까, 나는 히잡 쓰는 것 괜찮아"
히잡을 쓰는 것은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이고 또한 본인 스스로와의 약속이라면서 히잡은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끔 해주는 힘이라고 했다. 엘리프 덕분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나 오해를 풀 수 있었고 또,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터키의 98%는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슬람 교리를 들으며 자라기 때문에 알리신은 그들의 전부이자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프를 통해 직접 듣는 종교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종교뿐 아니라 터키의 정치, 경제 심지어 한국의 남북 관계에 관한 내용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국어로 대화하는 중에도 내가 지금 터키에 대해 잘 아는 한국인과 함께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 정도 수준으로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래서 이 친구가 더욱 특별하고 멋있게 느껴졌다.
한 번은 엘리프가 터키에 선교활동을 왔던 한국 기독교인 사람들을 만난 일화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 친해진 한국인 친구가 엘리프에게 한국어 이름으로 '주 기쁨'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엘리프는 한국어 이름이 생겨서 너무 기뻤고 만나는 한국인마다 본인의 한국 이름을 '주 기쁨'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한국인이 엘리프에 물었는데,
"엘리프, 그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다. 그런 좋은 의미 아니에요?"
'주 기쁨'의' 주'가 예수님(Jesus)을 뜻하며 결국 이 이름에는 '예수님의 기쁨'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이야기에 엘리프가 화들짝 놀라 바로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는 일화다. 터키에서 태어나서 20년 넘게 평생 무슬림으로 살아온 아이가 자신을 주 기쁨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으니 충분히 놀랄만했다. 그 일화를 다 듣고 난 후, 귀가 빨개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부끄러웠고 그 이름을 지어준 한국인에게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대신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히잡을 쓰고 평생을 무슬림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주기쁨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인이 믿는 종교가 중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고 믿는 종교도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부끄러움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다음날, 엘리프 없이 이스탄불 탁심 광장, 예레바탄 사라이, 부유 카다 섬을 둘러보고 고등어 케밥도 잊지 않고 먹었다. 신기하게도 유럽과 아시아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어, 낯설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풍경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마 이런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터키를 찾는 것이 아닐까. 형제의 나라로도 잘 알려진 터키는 한국인들에게 더욱 친근하고 가까운 나라로 느껴진다. 한국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분위기고 그런 한류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말을 잘하는 터키 사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안겨준 나라 터키. 가 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아서 반드시 다음에 다시 방문해야 하는 나라. 다시 가야 할 나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년이 지난 현재, 엘리프는 그동안 한국 방송에 출연하고 각종 말하기 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더 발전하고 나아가는 친구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터키에서 가장 잘한 일은 엘리프를 만난 일이었다. 또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너 근데 진짜 한국인 아닌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