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들인 날
뮌헨에서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뮌헨으로 이사 오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그 5년 동안 정기적으로 뮌헨에 왔었다. 겨울 날씨는 어떤지(싱가포르에서 오래 살다 가는 거라 난방시스템이나 겨울 날씨는 우리에게 무척 중요했다), 사람들 인심은 어떤지,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인지, 치안 문제는 어떤지 등등 많은 것들이 궁금했다. 뮌헨행 결정을 한 후에는 애들 학교는 어디로 보낼 것인지, 어느 동네에 살 건지, 집값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또 뮌헨으로 왔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속해서 알아보면서 살기 좋을 거 같단 결론을 내렸다.
몇 년간의 답사 후 내린 독일에 대한 인상은 '깔끔'하고 '안전'하고 '사람들 인심도 좋은 거' 같고 '영어도 통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나름 많이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이사를 왔다. 하지만 관광객으로선 겪을 수 없는 거주자만이 겪는 상황이 분명 있었다. 결국은 좌충우돌 경험을 통해서 익히게 되는 여러 상황이 발생하였다.
우리나라만큼 융통성과 순발력이 좋은 나라도 없다.
이사를 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러 유럽 최대 가전 유통점인 ‘ 미디어마크(MediaMarkt)’를 갔다. 신중하게 물건을 고르고 예약을 했다. 돈은 배달이 왔을 때 지급하면 된다고 했다. 언제 배달이 올 거라는 날짜가 적힌 청구서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세탁기와 건조기가 도착한 날, 물건을 싣고 온 직원이 직접 설치를 해줬는데 대략 1시간이 걸렸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계산하려고 신용카드를 내미니, 카드 결제는 안된단다. 카드 결제는 물건을 주문할 때 미리 말했어야 했다고 한다. 기계 2대를 사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은데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해 두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싱가포르처럼 수표(cheque) 발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왜 그때 우리한테 안 물어봤을까?
어찌 보면 서로가 당연하다 생각했겠지만, 서로에겐 당연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마트 직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먼저 카드로 결제하겠다고 말해야 했겠지만, 외국인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직원이 우리에게 어떻게 결제할 건지 물어봤어야 했다. 여행자로 왔을 땐 전혀 불편함 없이 사용했던 신용카드가 이곳의 거주자가 된 후로는 불편을 종종 겪었다. 지금이야 우리도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카드 단말기를 가져오지 않아서 결제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작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다음에 한 직원의 행동이었다.
그 직원이 내일 다시 오겠다더니 설치한 세탁기와 건조기를 다시 해체하기 시작했다. 가져갔다가 내일 다시 가져오겠단다. 두 명이 오긴 했지만 세탁기와 건조기를 차에서부터 지하 세탁실까지 들고 나르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거다. 적어도 2번은 왔다 갔다 하며 세탁기와 건조기를 각각 날랐을 텐데, 자그마치 1시간 동안 낑낑거리며 설치한 기계를 전부 풀어서 다시 가지고 가겠다고? 가져갔다가 내일 다시 가져와서 지금 한 일들을 되풀이하겠다고?
어머나,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우리가 그냥 둬도 괜찮다고 했지만 결국 설치한 걸 다 풀어 하나하나 박스에 담아 가져 갔다. 그러곤 다음 날 카드단말기와 함께 다시 들고 와서 1시간 동안 재설치했다.
참 융통성 없어 보이고 황당한 상황이었다. 왜 이러실까?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여기 산다는 것도 아는데, 왜 다시 가져갔을까? 이삿짐이 아직 도착 전이라 텅 빈 집을 보고 우리가 야반도주라도 할 거라 생각했던 걸까? 설치해 주고 돈 받아 오라는 매뉴얼에서 어긋나니 그냥 다시 가져가겠다는 건가? 아님 시간과 배달 건수로 수당을 받는 건가? 속으로 '앗싸~~ 건수 더 생겼다'를 외치는 걸까?
이런 식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겠지? 도대체 얼마나 많았으면.... 난생처음 겪어보는 황당한 일을 이해하기 위해 별별 상상을 다해봤다.
세탁기를 배달하고 설치한 기사는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다. 회사의 방침인지 배달 기사의 개인 판단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행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게 마트 측의 방침이라면, 왜 매장 직원에게 반드시 물건을 주문할 때 어떻게 결제를 할 거냐고 물어보란 지침은 안 내렸을까? 물론 그 직원이 깜빡했을 수도 있겠지만, 물건 주문방식도 다르긴 했다. 보통 주문하고 그 자리에서 계산하는데 반해, 독일은 물건을 받은 후에 계산했다. 그런 주문방식을 몰랐던 우리는 주문하던 그때 카드를 내밀었었는데, 왜 그때 말 안 해줬던 건지!!
아무튼 애꿎은 배달기사만 고생을 했다. 본인은 매뉴얼을 따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차선의 방법은 없었을까? 싱가포르 살 때도 느낀 거지만, 어떤 규율이나 법규가 까다롭고 세밀하게 많다는 건 그만큼 법이 없으면 통제가 힘들다는 뜻인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관광으로 왔을 땐 신용카드 사용이 문제가 없었는데, 거주하면서부터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신용카드 결제는 전부 일시불이었다. 아마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으로 분명 신용 불량자들이 많이 늘어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싱가포르 살 때도 사람들 참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독일도 만만치가 않다. 한국처럼 융통성이나 순발력이 좋은 나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