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손남편의 남다른 재주
곰손남편에겐 남다른 재주가 있다. (왜 곰손인지는 이전 글 '곰손남편'을 읽어보시길. https://brunch.co.kr/@jinseon/37))
어떤 물건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용케 엉뚱한 물건을 찾아서 사 오는 재주이다. 이번에도 갑자기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싶은 아이들이 아빠에게 라면 부탁을 했다. 다행히 우리 동네 슈퍼는 2종류뿐이지만 한국 라면을 판다. 운동한다며 나간 아빠에게 신라면(매운맛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과 순라면(자기들이 먹을)을 올 때 사다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나는 그때 하루 만보 걷기 목표 달성을 위해 동네를 돌고 있었고 아이들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온라인 수업 중이었다.
'제대로 샀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사다 놨고 난 사무실 간다'라는 문자가 왔다. 점심으로 오랜만에 김밥을 만들어 먹을 계획이었으나, 문자를 받고 나니 라면에 더 끌렸다. 만보 걷기를 마치면 허기가 져서 김밥 쌀 여력도 없을 거 같았다. '그래 저녁에 김밥을 싸고 점심은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자'라고 결심을 한순간, 내 머릿속은 온통 라면 생각뿐이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장바구니부터 찾았다. '어라? 라면 3개가 들어 있을 텐데 가방이 왜 저렇게 홀쭉하지?' 언제나 안 좋은 예감은 비켜 가질 않는다. 장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니, 일본 생라면 사리만 2봉지가 들어있다. 도대체 이 라면사리는 어디서 발견한 걸까?
곰손 남편은 늘 그랬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엉뚱한 아이템을 용케 잘 찾아서 사 온다. 그리고 엉뚱한 걸 사 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당당하다. 난 우리 동네 슈퍼에서 생라면 사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라면을 먹을 거란 기대가 컸던 만큼 우리는 실망도 컸다. 결국 우린 생라면 사리에 모아놓았던 라면 분말스프를 넣고 끓여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몇 년 전에는 출장길에 오른 남편에게 면세점에 들러서 내 아이섀도를 사다 달란 적이 있다. 쓰던 아이섀도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원하는 브랜드와 원하는 아이섀도를 직접 보여줬다. 나에겐 같은 브랜드의 아이섀도가 2종류 있었다. 하나는 5개의 색상이 한 팔레트에 들어가 있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3개의 색상이 한 팔레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였다. 내가 원한 건 3개짜리였다.
남편에게 직접 보여주며
"5색 섀도 말고 3색 섀도로 사와, 알았지? 3개 짜리야, 3개"
"오케이"
곰손 남편은 대답 하나는 정말 시원하게 잘한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당당하게 내민 섀도는? 5색짜리였다.
독일 와서는 유명한 양상추 사건이 있다.
양배추(cabbage)를 사 오라고 했더니 양상추(lettuce)를 사 왔다. 독일에는 다양하게 생긴 양배추가 있다. 모양만 다른 건지 사용 용도도 다른 건지는 모르겠다. 납작하게 생긴 양배추, 고깔 모양으로 뾰족한 양배추, 둥글게 생긴 양배추에도 몇 종류가 있었다. 화려하게 펼쳐진 초록 잎 속에 감춰진 양배추도 있다. 양배추와 배추를 섞은 듯한 모습이다. 아무리 다양한 종류의 양배추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양상추와 양배추가 헷갈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2번째 양배추 심부름을 시킬 땐 나도 나름 머리를 써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그랬더니 곰손 남편은 양배추같이 생긴 양상추를 사 왔다. 이거 실화냐?
2번째 양상추 사건이 있고 난 뒤, 양배추 심부름은 안 시켰다. 속이 터져서라도 양배추를 사 오란 부탁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란 게 또 그리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양상추 사건의 악몽(?)이 잊힐 때 즈음, 남편에게 양배추를 사 오라는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시 발생했다.
이제 남편도 양배추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나 보다. 살면서 요리라고는 달걀을 2번 삶아 본 게 고작인지라 이젠 뭐가 양상추인지 뭐가 양배추인지조차도 헷갈리는 거 같았다. 양배추 말만 꺼내도 작아지는 남편이 선택한 방법은 8살 된 아들을 데리고 가는 거였다. 2번이나 양상추를 사 오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아들도 한심했었는지, 아들도 자신있게 따라나섰다. 아들이 '엄마가 지난번에 이걸 샀어'라며 자신 있게 선택한 건 배추(우리가 아는 일반 배추, 외국에선 흔히 Chinese cabbage라고 부름)였다. 그 아빠에 그 아들이었다. 딱 한 번 아들 데리고 배추를 산 적이 있었는데, 하필 그걸 기억하다니....
양배추 사기가 이렇게 어려웠던가? 아무리 집안 살림엔 젬병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였나? 이쯤에서 왜 직원한테 안 물어봤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 나온 유머가 있다. 남녀의 차이를 빗대어 나온 유머인데, 여자는 운전하고 가다가 좀 헷갈린다 싶으면 바로 주유소로 가서 길을 물어본다. 그러나 남자를 헤매고 헤매다 기름이 떨어져서야 주유소에 가서 물어본다는 얘기였다. 그만큼 남자들은 물어보길 싫어한다는 얘기일 거다. 그래서 안 물어봤을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자기가 사는 양상추가 양배추임에 확신을 가졌을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러 양배추의 악몽(?)이 사라질 즈음 또 남편에게 양배추 심부름을 시켜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이번엔 나도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그래 적양배추를 사 오라고 하자'였다. 이건 안 헷갈리겠지. 색상에서 이미 확실하게 구별이 되니 이번엔 실수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생각을 해낸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 러. 나!!
집으로 온 곰손 남편의 손에는 적양배추 대신에 적양상추(radicchio)가 있었다. '도대체 이건 어디서 찾아서 갖고 온 거야!!!!' 라디키오는 내가 그동안 사고 싶어도 발견하지 못했던 거다. 이건 모양만 양상추를 닮았지 치커리과에 속해서 양상추랑 맛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라디키오는 양배추나 양상추 코너에 있는 게 아니라 샐러드가 있는 냉장고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 왜 거기로 가서 그걸 봐버렸냐고요~~~!!!
4:0으로 내가 완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제 절대 양배추 심부름은 시키지 않으리라! 그날 이후 난 남편에게 절대! 절대! 절대로! 양배추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날 이후 해독주스 마시기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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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모임이 있던 날 양배추 에피소드를 들려 줬다. 친구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고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고 했다. 친구 중에 2명은 독일 남자다. 그중에서 집안 살림 잘하는 친구가 하루는 곰손남편을 놀리려고 단톡방에 자랑스럽게 '이게 바로 양배추다!' 하며 사진을 올렸는데, 보니 양상추였다.
그날 이후 난 남편을 용서하기로 했다. 살림 잘하는 독일 친구도 헷갈리는 판국에 '살림의 살'자도 모르는 남편의 실수는 그냥 애교였던 거다. 독일에서 Kolh(배추)을 사기가 쉽지는 않다. REWE(슈퍼마켓 브랜드)같은 곳은 늘 팔기는 하지만 어떨 땐 그 종류가 엄청 많고 어떨 땐 딱 한 종류만 있을 때가 있다. ALDI(도매에 가까운 슈퍼마켓 브랜드)에는 봄이나 여름엔 양배추가 없다.
양상추는 Eisbergsalat 라고 표기를 해 둔 곳도 있고 그냥 Grüner Salat이라고만 표기해 둔 곳도 있다. Grüner Salat이라고 전부 양상추도 아니다. 일반 상추부터 또 그 종류가 다양하다. 마트에 진열된 상품은 갈 때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독일 친구도 헷갈렸었나 보다.
어쩌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생김새만 보고 양배추와 양상추를 구분 못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실수로 웃음을 안겨주는 곰손남편에게 감사를 보낸다. (나의 브런치 글에서 조회 수 10만이 넘는 건 모두 곰손 남편 관련 얘기였다)
사진 보고 차례대로 이름 맞춰 보실래요? 어떤게 양배추이고 어떤게 양상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