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사람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Ep.6
새집으로 이사 왔다. 아, '새집'이라는 표현은 신축이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다. 내가 말하는 새집의 의미는 내가 거주한 시간을 기준으로 '옛날집 = 이사오기 전 경기도 집', '새 집 = 이사 온 제주도 집'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거주한 시간을 기준으로 ‘새집’이라고 불리게 된 제주집은 지어진지 30년도 더 된 아파트다. 나랑 나이가 비슷하다. 정확하게는 내가 집보다 5살 언니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는데, 비 오는 날이면 작은방 창틀로 비가 들어온다. 외벽방수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다. 군데군데 삐그덕 거리긴 하지만, 오래된 아파트는 나름의 단단한 질서가 있어서 좋다. 아파트 화단에는 커다란 나무가 많다. 줄기가 굵직한 나무들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 단단한 안정감이 든다. 새로 지은 신축 아파트에 아무리 조경을 요리조리 아기자기하게 꾸며봐도, 오래된 동네의 커다란 나무가 주는 단단함을 흉내내기 힘들다. 오랜 시간만이 만들어 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오래된 아파트의 튼튼한 질서가 좋다. 비가 오면 아파트 현관 입구에 우편함 우측으로 15센티미터 정도의 위치에 노란 플라스틱 박스가 놓인다. 현관 구조상 물이 딱 이 자리에 모여서 뚝뚝 흐르는데, 딱 여기 이 자리에 물받이 통을 놓으면 웬만해서는 현관에 물이 흥건해지지 않는다.
재활용품을 배출하는 날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이다. 스티로폼을 내어놓는 곳은 분리수거장과 벽 사이 초록색 그물이 쳐진 곳이 있다. ‘여기는 스티로폼 버리는 곳입니다’라고 쓰여있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여기에 비닐을 떼어낸 스티로폼을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새집의 가장 좋은 점은 거실 창문으로 중학교가 한눈에 보인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이어지는 곳에 시계를 달았는데, 소파에 앉으면 시간이 잘 보이지 않아서 시계를 하나 더 살까 하고 쿠팡을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실 창으로 중학교 운동장의 커다란 시계를 보고 장바구니에서 지웠다. 운동장은 하루에도 몇 번 얼굴이 바뀐다. 운동장의 아침은 가장 생명력이 느껴진다. 아침 새벽에는 부지런한 동네 아저씨들이 운동장을 달린다. 연둣빛 나뭇잎이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면 우리 아기가 어렸을 때 솜털이 보송보송 난 얼굴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련해진다.
중학교 아이들이 등교하기 시작하면 또다시 운동장의 얼굴이 바뀐다. 교문에 선생님인지 교장선생님인지 어른이 한분 나와서 아이들에게 하이파이브! 하고 손을 내민다. 어떤 아이들은 짝 소리가 나게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어깨가 축 처진 여자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까딱, 인사하고 지나간다. 덩그러니 남겨진 선생님의 한쪽 손이 괜히 안쓰럽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장의 얼굴은 오후 2시의 표정을 지을 때다. 남색 체육복을 갈아입고 나와서 운동장을 달린다. 남자아이들이 키카 크고 회색 운동복을 입은 체육 선생님이랑 농구를 한다. 탕! 탕! 탕 하고 공이 튀기는 소리가 7층까지 울린다. 여자아이들은 게이트볼을 한다. 망치처럼 생긴 기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동그란 공을 친다. 공을 칠 때 탁!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게이트볼을 쳤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열심히 하는 아이, 한 손으로 햇볕을 가리면서 대충 하는 아이, 벤치에 앉아 있는 아이, 시종일관 장난만 치는 아이가 그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잠깐 생각한다. 탕탕탕 탁탁탁
한 번은 게이트볼 치는 여자가 이와, 농구치 던 남자아이가 스치듯이 운동장 가운데쯤에서 살짝 손을 잡는 모습을 봤다. 웃음이 살짝 났다가, 조금 설레기도 했는데 결국은 ‘저것들 부모님들은 연애하는 거 알려나'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나 보다.
남편이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나서 남편에게 설거지를 부탁하고 학교 운동장에 운동하러 나간다. 저녁이 되어가면 운동장의 얼굴이 가장 극적으로 바뀐다. 학교 운동장에 가로등이 환하게 켜질 만도 하겠만 가로등이 없다. 아파트 단지에 빙 둘러싸여 있어서, 아파트 빛으로 적당히 밝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계단식 스탠드가 있는데, 움직이면 빛이 들어오는 자동센서등이 달려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녀 커플 아이들이 여기 앉아서 서로의 손을 쪼물딱 거리다가 밝은 빛이 갑자기 훅하고 들어오면 민망한 듯 웃는 소리를 낸다. 며칠 전에는 빛이 들어오든말든 뽀뽀하는 아이도 봤다. 빛이 들어왔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운동장을 4바퀴 정도 돌았는데, 중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4명이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살짝 스쳐갔는데 담배냄새가 났다. 여자아이들은 운동장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더니 블루투스 스피커를 켰다. 그러더니 내가 모르는 요즘 노래를 틀어놓고 크게 부르기 시작했다.
혼자 운동장을 걷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는데, 마침 '방금 저녁 먹을 때 내가 괜히 아이한테 잔소리를 한 것 같네.'라는 생각을 할 때였다. 그때 운동장 한가운데서 "꺼져! 겟어웨이~~"하고 노래를 불렀고, 나는 괜히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아이들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아는 노래가 한곡도 없었는데, 마침 내가 아는 노래가 나와서 무척 반가웠다. 김현정의 노래였다.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잠시 너를 위해 이별을 택한 거야~~~!" 아는 노래가 나와서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춤까지 추면서 소리가 너무 커져서 조금 시끄럽다 싶긴 했다.
아기가 잠든 집도 있을 텐데 소리가 방방 울리지는 않을까 생각하다가, 9시 넘어서까지 시끄러우면 조심히 말해야지 하고 생각할 때였다. 한참 전부터 운동장을 뛰던 아저씨가 아이들 쪽으로 가더니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야!!! 너네!!
조용히 해!!!
여기 아파트잖아!!!!
아이들은 스피커를 껐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리고 쪽문 쪽으로 가서는 나가지 않고 주변을 기웃거렸다. 아까 그 아저씨가 운동장 트랙을 따라 가까이 왔을 때 네 아이가 소리 질렀다
"아파트가 아니라 학교다! 이 병 X새 X야!!!!!!!!!!"
휴_
말 걸지 않길 잘했다.
조각난 행복들을 긁어모아 나는 지금의 커다란 행복을 일구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잠깐 깜빡하고 있던 작고 소중한 나의 행복'을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_
한소리 들은 아저씨도, 담배 냄새나는 중2여자아이들도
운동장도, 아파트도
모두 굿나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