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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Sep 20. 2023

제주도민에게 맛집을 묻는다면

불행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ep.7

 남편이랑 밀면을 먹으러 갔다. 통통한 면발에 살얼음이 살짝 껴있는 시원한 국물, 위에 얹어진 담백한 돼지고기까지. 그 시원한 맛이 생각나면 찾는 동네 맛집이다. 평소처럼 테이블에 앉자 “밀면 2개요, 하나는 곱빼기로 부탁드릴게요” 하고 말하려는데 메뉴판에 새로운 메뉴가 보였다.     

 

밀면 만원

왕만두 만원

보말칼국수 만원     


오늘 바깥 온도는 32도. 집에서부터 걸어서 겨우 15분 걸리는 길에 등에 땀이 줄줄 흐른다.

      

“사장님 여기 밀면하나 보말칼국수 하나 주세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슨 고집인지 보말 칼국수를 시켰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에 나온 보말 칼국수는 국물이 걸쭉했다. 숟가락으로 자그마한 보말 몇 개와 걸쭉한 국물을 한입 떠먹어보았다. 너무 익숙한 맛이 나서 깜짝 놀랐다. 동남아를 여행하다가 한국어가 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반가움이랄까. 외국 어느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bts의 노래를 들었을 때 느낌이랄까.     


“아! 외할머니!.”    

 

음식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왔다 갔다 여행할 수 있는 마법의 힘이 있다. 지금 내 마음은 10살, 바다냄새가 나는 서귀포 할머니네 집에 있다.      


할머니네 집은 바닷가 바로 앞에 있었다. 엄마는 어릴 시절을 몽땅 보낸 그 집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 해일이 불면 바다의 물이 차고 집채만 한 파도에 바다 돌맹이에 집안 유리가 깨지던 기억을 자주 뱉어냈다. 지금은 방파제가 있어서 살만하지만, 어릴 때는 태풍만 불면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고.     


엄마에게는 공포의 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일 년에 고작 두 번 설과 추석 때나 갈 수 있는 할머니네 집은 나에게는 최고의 놀이터고 안식처였다. 할머니네 집 목욕탕은 집 바깥에 있었다. 현무암 돌담을 쌓아 시멘트로 바른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빨랫비누와 새 수비누를 나란히 놓는 두 칸짜리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 밑에는 집게발을 까딱거리며 옆으로 걷는 꽃게가 숨어 있었다.      


녹이 잔뜩 슬어 있는 초록색 철문을 삐그덕 하고 열면 바다가 보였다.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좌우로 바다를 눈에 담고 있으면 저기 바다에서 할머니가 커다란 대야를 들고 걸어왔다.  

    

“진아 나와 이서시냐~”

(진아 나와 있었구나)     


활짝 웃는 할머니의 플라스틱 대야 속에는 보말이 가득 들어있었다. 부엌에서 할머니는 보말을 삶았다.  방금 삶아낸 보말에서는 바다냄새가 났다. 언니와 나와 동생은 나란히 앉아 뾰족한 옷핀을 하나 손에 들고 쪼그려 앉아 보말을 먹었다. 뾰족한 침을 꽂아서 조심조심 돌돌 말아야 보말이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나왔다. 어떤 보말 안에는 조그마한 가재가 들어있기도 했다. 입이 짧은 언니는 몇 개 먹고 손을 털어버렸고, 까불이 남동생은 가만히 앉아 옷핀을 요리조리 돌리는 것이 힘들어 휙 하고 먼저 일어나 버리곤 했다.   

  

그러면 언제나 나와 할머니만 남았다. 할머니와 나는 둘 다 별로 말이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다른 친척들처럼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올해 몇 살이니?”라고 묻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냐는 둥, 친구는 많이 있냐는 둥 부담스러운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공부도 못하고 친구도 몇 없는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어도 되는 할머니가 편안했다.     

 

할머니가 했던 말 중에 기억나는 말은 딱 한마디밖에 없다.      

“세뱃돈 얼마 받안디?”     


언니는 첫째라서, 초등학교 입학했으니까. 중학교 갔으니까 다양한 핑계로 만원을 받았다. 남동생은 남자이기 때문에 만원을 받았다. 이도 저도 아닌 나는 5000원짜리가 가득했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는 천 원짜리 몇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내가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까지도 할머니다웠다. 크게 아프신 곳도 없고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도 않았다. 그냥 매일과 같은 하루를 보내다가 어느 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를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은 몇 해를 거슬러 가야 한다. 고등학생쯤이었나, 아직은 엄마 아빠를 따라 외가댁에 가던 그때. 보말보다는 손에 쥐어주는 용돈이 좋아서 가던 때쯤이다.      


하루를 자고 우리가 다시 제주시로 떠날 때면 저기 뒤에서 초록색 대문 앞에 서서 아주 오랫동안 손을 흔들고 흔들던 할머니가 보인다.      


이제는 할머니를 종종 만날 수 있겠다. 집에서 걸어서 15분만 가면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걸쭉하고 깊은 맛이 나는 보말칼국수를 자주 먹으러 올 거다. 몸과 마음이 허전할 때면 혼자 와서 따뜻한 보말 칼국수를 한 그릇 비워낼 것이다. 할머니와 아무 말 없이 단둘이 있었던 그때처럼 아무 말 안 해도 온 마음이 따뜻해질 것이다.







조각난 행복들을 긁어모아 나는 지금의 커다란 행복을 일구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잠깐 깜빡하고 있던 작고 소중한 나의 행복'을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_



다섯 번째 작은 행복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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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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