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Ep.9
어릴 때 죽을 뻔했던 기억이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대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에 아빠가 구해줬다. 내가 6살, 아니 7살쯤이었던 것 같다. 아빠 초등학교 동창 6명 정도가 함께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에서 우리 아빠가 24살에 가장 일찍 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모임에 나오는 친구들 중에 또래는 없었다. 네댓 살 어린아이들이나,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느 여름에는 숲에 천막을 쳐서 같이 고기를 구워 먹던 기억도 있고, 어느 해 여름에는 우리 집에 다 같이 모여서 김밥을 싸서 소풍을 갔던 기억도 있다. 밥에서 식초냄새가 시큼한 김밥은 처음 먹어봐서 몰래 계란과 햄만 쏙쏙 빼먹다가 엄마의 “씁!”소리와 함께 등짝을 얻어맞았던 기억이 난다.
그해 여름은 서귀포에 있는 어느 계곡으로 놀러 갔다. 이 모임을 할 때면 우리 아빠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야 대진아! 너 옷이 그게 뭐냐” 라며 친구들과 장난기 섞인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나의 아빠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구나, 내가 모르는 아빠의 모습을 대진이 삼촌을 알고 있기도 하구나, 이런 생각을 어렴풋 이하기도 했다.
대진이 삼촌은 이날 계곡 바위 사이사이에서 개구리를 잡았다. 검은 비닐에 한가득 개구리를 잡더니, 불에 구워서 뒷다리를 뜯어먹었다. 이 자리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경악했고, 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아저씨는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더 짭짭거리머 먹었다. 대진이 삼촌은 몰랐을 것이다. 이 날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나이가 환갑을 넘었을 때까지도 '개구리 삼촌'이라고 불리리라는 사실을.
계곡물에 담가둔 수박과 자두를 먹었다. 수박을 물에 담가두면 차갑게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쩍 소리를 내면서 갈라진 수박은 생각보다 시원하지 않아서 맹숭맹숭했고, 오히려 상큼한 자두가 맛있어서 두세 개를 집어먹었다. 자두를 물에서 건져 올려 먹는 재미에 여러 개를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맥주를 한두 캔 씩 마시고 흥이 나있었고, 조금 어린아이들은 텐트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혼자 첨벙첨벙 거리며 놀다가 발을 헛딧었고, 갑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무서워서 입을 크게 벌리고 앙! 하고 울자니 입으로 물이 콸콸 들어왔고, 입을 다물면 코로 물이 들어왔다. 눈앞이 희미해진 기억까지 나는데, 눈물인지 계곡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수영복 바지만 입은 아빠가 날 흔들어 깨우던 기억이다.
삶의 어떤 순간은 몇십 년이 지나도 바로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한다. 그날의 기억이 그렇다. 그날의 기억이 결정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즈음부터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문득 생의 감각을 느낀다.
예를 들면 길거리를 걷다가 난데없이 오른발 왼발 차례대로 움직이는 두 다리가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파트 후문에 휘낭시에 찐 맛집이 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이런 작고 소중한 맛을 경험할 때면 '맛있다'라는 생각 뒤에 '참 살아있다는 건 신기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 것 같다. 동네에 있는 수목원의 똑같은 길을 똑같은 시간에 걸어도 매번 놀라고 만다. 너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다는 것이 참 놀라워서 결국은 커다란 나무에 손을 대어 보게 되는 것이다. 나무 위로 쪼르르 올라가는 다람쥐를 우연히 만나거나, 주인 없는 고양이, 이름 모를 새를 볼 때도 걸음이 멈추어진다.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비교적 우울한 DNA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생의 감각’이라는 든든한 보루가 있다. 문득 우울한 생각에 빠지고, 그 안에서 입과 코로 물을 잔뜩 먹으며 허우적거리기도 하지만 죽음이 더 자연스러운 이 우주에서 지금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신비함에 두 손을 앞뒤로 천천히 바라보거나 아니면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내가 좋든 싫든 100년도 되지 않아 없어져버리는 생명이라는 사실도 ‘삶의 감각’을 문득문득 깨워준다. 하루아침에도 사라질 수 있는 생명, 아무리 운이 좋아도 결국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면 또 한 번 놀란다.
버겁고 힘든 일을 마주했을 때도 “그래도 살아있잖아.”라는 주문은 꽤 효과가 좋다. 아침부터 생떼를 쓰면서 오만 짜증을 부리는 아이를 보다가도 문득 ‘살아 있다’라는 부분을 포커스를 두게 되면 마음이 조금은 잔잔해지는 것 같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둘이나 내 몸에서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눈앞에 있던 고민이 스르르 힘이 빠지는 걸 느낀다.
숨을 들이쉬고,
들이마신다.
살아있다.
생의 감각을 한껏 느껴본다.
조각난 행복들을 긁어모아 나는 지금의 커다란 행복을 일구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잠깐 깜빡하고 있던 작고 소중한 나의 행복'을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_
오늘도 살아 있구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