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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Aug 30. 2023

야생노루와 친구가 되었다

불행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ep.4

 집에서 걸어 나와 15분 정도 걸으면 숲길이 나온다. 양 옆으로 나무가 자라고 자라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늘을 겹겹이 만들어 놓아서 한여름에 걸어도 시원하다. 몸통이 굵은 오래된 나무들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웃는 나무도 있고 찡그리는 나무도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웃기려 작정하고 오만상을 짓고 있는 나무도 있다.    

 

숲길 중간에 나무로 된 팔각정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팔각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팔각정은 실제로 존재하긴 하지만 고정멤버인 아주머님 세분이서 항상 앉아 계시기 때문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셋 중에 머리가 빠글빠글한 아주머님이 언제나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 아주머님이 끝없이 이야기하면, 한 아주머님은 장단만 맞춘다.


"응~"

"맞아~그 집은 밑반찬이 맛있더라"

"언니네 둘째 아들이 효자야 효자"


그러는 동안 다른 아주머님은 듣는 둥 마는 둥 혼자서 브라질너트나 떡을 드신다. 냠냠.

역시나 우정은 밸런스에서 오나 보다.


한 번은 50대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았다. 맨발로 걷고 있었다. 남편이 양손에 신발을 한 켤레씩, 아내의 신발까지 손에 들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뒷짐 지고 있는 손에 두 켤레의 신발이 들려 있는 모습이 왠지 보기 좋아서 천천히 그 뒤를 걸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15살짜리 둘째 아들 걱정이다. 어제저녁에도 새벽 4시까지 게임만 했나 보다.


“잔소리하지 말고 기다려 주자 기다려 주자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는 화가 나더라.”

엄마는 씩씩대며 말했다.


 “첫째도 저러다가 말지 않았냐, 우리가 조금만 더 믿고 지켜봐 주자”


남편은 아내의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한 번은 맞은편에서 마주 보며 걸어오는 불덩이 같은 아줌마를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쭉뻗은 산책길저편에서부터 커다란 불덩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방방 소리를 지르면서 오고 있었다.      


“야! 김미자 그 년이 그렇게 말하더냐? 지가 우리 아들이 시간강사인지 뭔지 뭘 안다고!!!”     


불덩이 아줌마의 둘째 아들이 대학 교수가 아니고, 시간강사라고 미자아줌마가  이야기하고 다녔나 보다.  아직 50대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50대가 되어도 친구 사이에 싸우고 화해하고, 질투하고 이간질하고 다시 연락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조금 덜 외로운 마음이 든다. 불덩이 아줌마의 둘째 아들이 어서 정교수에 채용되었으면 하고, 미자 아줌마는 일단 불덩이 아줌마와 길거기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길 바라본다.     


아참. 얼마 전에는 정치인을 마주치기도 했다.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아저씨가 낯이 익어서 “어디서 봤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다. 나도 엉겁결에 안녕하세요라고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내 뒤로도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이어졌고 “아 맞다!” 하고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정치에는 큰 관심 없지만, 산책길을 걷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티브이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그를 보면 괜히 마음이 안쓰럽다. 원만히 해결되시길 바랍니다,


산책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을 만날 때가 가장 즐겁다. 나무 위에 앉아서 도로롱 도로롱 소리를 내는 진짜 새들보다 더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어온다. 아이들도 참 사랑스럽고 숲도 너무나 사랑스러운데 아이들을 품고 있는 숲은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럽다. 앞에 선생님이 한분 걸어오고 짝꿍과 손을 잡은 아이들이 두줄로 걸어오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씩 하고 난다. 아이들을 스칠 때면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갑자기 주저앉아서 콩벌레를 잡아 주머니 속에 넣는 아이, 그 옆에 친구가 콩벌레 잡느라 자기 손을 놓았다며 앙앙 울고 있는 아이, 바닥 떨어진 이름 모를 설익은 열매를 입에 넣고 있는 아이 그리고 앞뒤에서 이런 아이들의 손을 닦고, 입에 손 넣어서 열매를 꺼내고, 또 우는 아이 달래주는 선생님을 본다. 역시 아이들은 한걸음 떨어져서 봐야 귀엽다. 5살 둘째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을 잠깐 생각한다. 하원시키러 갈 때 커피라도 사다 드려야겠다.      


자주 노루를 만난다.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오늘 산책길에 노루를 만났다고 하니까 “야 구라 치지 마!”라고 했다. 조금 더 우기면 거짓말쟁이가 될 것 같고, 노루의 우주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나 역시 두 눈으로 보고도 이것이 꿈인가 하는 생각이 매번 들기 때문에 이 말은 하지 않았다.     


“노루가 자주 보이는데, 어느 날부터는 마주쳐도 도망가질 않아. 막 쪽으로 걸어온다.”     


친구랑 함께 이 길을 걷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노루야 그날도 조심히 이쪽으로 걸어와줘,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냐 안되느냐는 너에게 달려있어)

  

이 작은 숲은 이 동네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를 다 품어준다.


입이 싼 미자아줌마도 품어주고,

미자 때문에 개 짜증 난 불덩이 아줌마도 품어주고,

사춘기 아들 때문에 화가 난 엄마도 품어주고,

이래저래 머리가 복잡한 정치인도 품어준다.

눈이 우주처럼 새까만 두 마리 노루도 품어준다.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걷고 있으면

모든 걸 다 품어주는 숲처럼

나의 삶 역시 무척이나 안전한 놀이터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노원구 사는 내 친구 김아영은 똑똑히 보아라. 구라가 아니다.




조각난 행복들을 긁어모아 나는 지금의 커다란 행복을 일구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잠깐 깜빡하고 있던 작고 소중한 나의 행복'을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_



네 번째 작은 행복

우리 동네 소식을 모두 알고 있는

집 근처 작은 숲길



제10회 브런치 대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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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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