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흔적

by Letter B




어깨 높이만 하던 담장이 머리 크기를 훌쩍 넘어선다.

시야로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강둑을 보려면 몇 걸음이나 앞서가야 한다.

바닥으론 어느새 틈 사이사이 이름 모를 풀들이 삐죽 빼죽 자라 있다.

낮 사이 내린 소나기가 매일 지나던 길목으로 웅덩이를 하나 맹글고는,

저녁 노을의 빛깔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달빛이 곱다.


초록이 울창하게 메워진 산책로에는 봄을 지나 여름이 오고 있었다.

색이 말간 하늘이 유난히 미운 여름이다.

여름.


몇 년째 이름도 형체도 없는 여름이다. 소문만 무성한 그런 여름. 그런 여름 속을 걷고 있다.

후드득 떨어지던 소낙비만큼 차갑고, 시원하고, 꽤 지루하고, 속을 알 수 없는 그런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이 없다. 오며 가며 손길이 닿은 흔적이 계절을 논할 뿐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네모 반듯하게 나눠진 화단 위로 이제 막 활개하기 시작한 칼라가 화려한 꽃들처럼 말이다. 줄을 세워 심어진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눈에 보아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세워진 커다란 팻말 속에는 처음 보는 이름들이 번듯이 새겨져 있다.


시야를 가리는 담장 너머로 여름의 주인공이라도 찾듯 사람들이 스친다.

어쩌면 그저 구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화단 어귀로 공들여 새겨진 꽃들의 이름들이 반짝인다.

멀리 석양이 진다.


늘 하던 습관대로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름의 흔적을 떠올려 본다.


닮는데 이유가 있나요?

수상하긴, 싱거운 사람.


한참이나 지나서 깨달았어요.

사진 속에 새겨진 무수한 이름들을요.

돌아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는지도 모르겠네요.

아무개라고 불러도 좋아요.

이름이 없는 것도 괜찮겠어요.


그러다 우연히 만나는 자신의 모습에 근사하게 붙여진 이름을 찾아보는 겁니다.

조금 늦어버린 답례처럼 말이죠.


매 순간 자신을 지키는 일상에서 잠시 달아나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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