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에까지 26년의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단다.
중, 고등학교 때 교과서나 가끔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지문글로 접해본 적 있지?
글을 집필하신 박경리 작가님은 ‘토지’ 1부를 연재하시던 중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어.
지금도 암이란 병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한 난제로 무시무시한 병인데 그 당시 병마와 싸우며 집필활동을 한다는 게 엄마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단다.
박경리 작가님은 1973년 6월 3일 밤, 암 진단과 수술을 겪은 뒤 《토지》 1부 앞머리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쓰셨단다.
‘1971년 8월, 암이라는 진단에 의해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 휴식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야릇한 쾌감 비슷한 것도 있었다.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중략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마지막 시각까지 내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으리.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토지, 박경리 서문 중에서 )
암수술 후 통증은 극에 달하고 시력은 급격히 감퇴되었으며,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고통스러웠을 텐데 오히려 평온하고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는 해석과 표현에 아픔을 초월한 그녀의 창작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생을 바라보는 겸손한 모습에서 엄마는 가슴에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단다.
‘이게 바로 삶이다. 제대로 사는 사람의 삶, 한없이 망설여지고, 통증이 밀려오지만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중략
‘통증이 절정에 달해 죽음조차 두려워지지 않는 그 순간에 오히려 눈빛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고, 글쓰기를 선택했다. 죽음보다 더한 통증이 찾아와도 굴복하지 않고 등을 돌려 달아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싸워 이기겠다는 나를 발견한 순간, 정신이 완성되는 것이다.’
중략
‘이 통증은 저주가 아니라 인간을 비약적으로 날아오르게 만드는 통증이다.’
(고전이 답했다, 고명환)
통증에 의해 우리의 삶이 잠식됐다고 한들 일상이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는 건 아니야.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곧 죽을 것만 같은 통증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 하더라도 계속 흘러간단다. 중요한 건 내 정신과 내 의식이 어디에 머무르느냐 나의 관심이 신체의 유형의 통증에 있느냐? 아니면 영혼의 무한의 초월된 가능성에있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계속 흘러갈 것인지 멈춰버릴 것인지가 결정되어진단다. 토지 박경리작가님이 통증에 정면으로 맞서 흘러가는 삶속에 나를 세워두고 글쓰기에 더욱 매진하고 몰두했던 것 처럼 우리의삶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살 수는 없단다.
그렇기에 ‘아프지 않게 사는 법’을 고민하기보다는, ‘아플 때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지. 피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삶은 멈추지 않으니까.
통증과 함께 걸어가는 법, 두려움 속에서도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워가는 게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
통증은 단순히 ‘아픈 증상’이 아니라 ‘통과하는 증상’이란다.
나에게 찾아온 통증을 해결하지 말고 해석하렴.
누구든 살아가면서 몸이든 마음이든 통증을 겪게 된단다.
그럴 때 이 말을 기억해 주렴. 통증은 때로 우리를 넘어뜨리지만, 또 어떤 통증은 우리를 키운단다.
그 통증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해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아픔을 잘 통과할 준비가 된 거야.
옛말에 ‘아이들이 아프고 나면 훌쩍 큰다는 말’이 있어. 이 말은 단순히 키가 크거나 체중이 는다는 뜻이 아니라, 아픔이나 어려움을 겪고 나면 아이가 한층 더 성숙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신체적인 성장뿐 아니라 아픔을 겪으며 아이는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이고, 약해진 자신을 받아들이며, 회복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배움으로써 정신적인 성장도 하게 되지. 또한 건강이 늘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경험하고 나서야 삶의 이치를 배운단다. 어때? 통증이 아이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어주겠지?
응당 아이뿐이겠니? 어른도 마찬가지 란다.
통증은 너를 통과하면서 ‘너라는 하나의 통’을 키우는 증거인 것이지.
이것은 생명과 성장의 증거이자 삶의 증명이 되어 준단다.
통증은 정신, 감정, 신체를 연결하는 감각의 통로이고 그로 인해 너의 통은 더욱 커질 거란다.
그렇게 키워낸 통은 네 인생을 한결 여유롭게 해 준단다.
너는 통증이 너를 통과하여 너를 키우게 하고 싶니?
아니면 네가 통증을 통과하지 못해 끌려다니고 잠식당한 채 나약한 심신으로 살고 싶니?
아이야, 엄마는 당부하고 싶어.
‘질병은 한 인간의 의식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상태야. 이렇게 내면의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은 몸을 통해 통증으로 나타나지. 그러니 통증은 신호이자 정보 제공자란다.’
(몸은 알고 있다, 뤼디거 달케, 토르발트 데트레프센, 이지앤, 2009. 단, 필자는 증상을 통증으로 표기한다.)
그러니 너는 네 몸이 보내는 신호와 정보를 잘 해석하여야 해.
통증(痛症)이라는 증상을 통해
통과(通過)하는 증거가 되어
통(桶)을 만들어 너를 증명하렴.
“통증은 통과의 증거가 되어, 결국 너라는 존재의 증명이 되고, 너를 더 큰 너(통)로 키워줄 거야.”
‘통증들은 실제로 어디가 온전하지 못한 지를 알려주고, 우리가 주의 깊게 보완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줌으로써, 그러한 증상들이 더 이상 나타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기회를 준다. 체험을 통한 인식 과정과 깨달음을 통해서!’
(몸은 알고 있다, 뤼디거 달케, 토르발트 데트레프센, 이지앤, 2009. 단, 필자는 증상을 통증으로 표기한다.)
엄마 얘기를 다시 해줄게.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엄마는 주사를 맞는 것처럼 예측 가능한 신체적 통증은 그다지 두렵지 않아. 오히려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아픔이 더 크게 작용할 때가 많아. 내 몸이 아프면, 또는 아플 것 같으면 내 인식이 ‘BRAKE’를 걸며 나에게 신호를 보내오고, 그러면 내 일상은 ‘All STOP’이 되어버리지.
내 머릿속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는 고정관념이 있어.
“나는 몸이 약하니까 뭘 하고 나면 반드시 아프다. 큰 일을 앞두고는 부담감과 두려움으로 병이 난다.” 이런 생각은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며 정신을 잠식하고, 마치 나를 가스라이팅하는 것처럼 느껴져. 당장 쉬거나 하려던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더 크게 아플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단다.
어느 순간, 반복적인 신체의 ‘브레이크’는 무의식의 신념에 종속되어 내 인생의 패턴이 되어버렸단다. 엄마는 더 이상 이 반복적인 통증의 패턴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어. 그 사슬을 끊기로 결심했단다. 엄마 자신을 위해서도, 너희를 위해서도 말이야.
패턴을 자각하고, 그 신호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순간, 변화의 가능성은 시작된다고 믿어. 그러니 통증은 멈춤이 아니라 체(體)를 흔드는 채(篩), 즉 나를 더 정제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한 기회야. 내 몸을 진동시켜 나를 흔들고, 더 잘 쓰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거지. 불평이나 불만으로만 보지 않고 변화의 성숙을 위한 ‘걸러짐’으로 해석한다면 어때? 너도 통증을 잘 맞이할 수 있겠지?
그러니 이제 통증이 찾아온다면 적어도 ‘왜 아픈가, 왜 또 이러는가 괴롭다.’라는 생각보다 먼저
“이번에 내게 온 통증은 어떤 통로를 열어주려는 걸까?”
“나는 또 어떤 방식으로 이 통을 만들어 나를 증명하면 될까?”
“이 통증으로 나는 또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
이렇게 신호를 읽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가 지난한 세월을 견디고 나를 또 너희를 위해 극복해야 했던 책임통.
살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려 하는 우리들의 존재통.
사랑하면서 겪는 괴로움과 아픈 사랑통.
자신을 탓하며 괴로워하는 자책통.
언젠가는 우리 모두 필연적으로 겪게 될 이별통.
우리가 커지는 과정 속에 항상 함께하는 성장통.
누군가에게 서운한 마음이 고통스러운 애통.
참을 수없이 슬픈 비통.
질병과 육체적 통증 두통, 치통, 요통, 복통 신경통, 관절통.
통증의 의미 그 통증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너에게 온 모든 ‘통‘들에게 가만히 물어보렴
“어떤 증거가 되어, 너를 증명하여 더 큰 너(통)로 키우려는지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평생을 지속적인 신체의 통증을 겪으며 고립된 삶을 살다가 정신병으로 말년을 보내며 사망한 사람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는 삶 전체가 통증의 연속이었어.
‘나를 죽이지 못한 통증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위버멘쉬, 프리드리히니체, 떠오름, 2025 단, 필자는 고통을 통증으로 표기한다.)
그의 철학은 자신의 통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통과하려는 의지에서 시작되었고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고 주장하였어. 통증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해석했단다.
너는 어때 이제 이 말에 동의하니? 아니면 반대하니?
죽음보다 더 큰 통증의 터널을 지난 후 더 무서운 건 너덜너덜해진 빈껍데기에 불과한 정신없는 신체만 남기기보다 그 통증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을까?
더 무서운 건 아플 만큼 다 아프고 남는 게 하나 없다는 거란다.
나라는 통은 비어있어 통증이 너를 통과하여 나갈 때 금을 내보낼지 동을 내보낼지 내가 하기 나름이란 걸 항상 기억하기를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