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배 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도 어찌할 수 없어
살 속으로 스며드는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가을이다. 하늘은 높아지고, 날씨는 선선해지며, 마음은 몽글몽글해져 시 한 편이 읽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가 떠오른다. 간장게장을 소재로 눈시울을 적시게 한 시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오래전 감명 깊게 본 영화 ‘타이타닉’ 속 한 장면도 떠올랐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이들을 재우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구명정에 타지 못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끝까지 따뜻한 안식을 주려 자장가를 불러주는 그 장면. 두려움 속에서도 엄마로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시 속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와 맞닿아 있었다. 어쩌면 이 구절은 모든 엄마들의 마음과도 통했기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을 거라 생각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자 식욕이 왕성해지는 계절이다. 또한 꽃게의 제철이기도 하다.
알이 꽉 찬 암게는 봄에 주로 먹지만 가을철(8월 말~9월)에는 살이 꽉 차올라 단단하고 감칠맛이 뛰어난 가을 수게를 먹는다. 김포로 이사 온 뒤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강화도가 가까워 싱싱한 수산물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명항까지 직접 가서 철철이 꽃게와 대하, 새우젓을 사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지금은 굳이 항구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집 근처 마트에서 강화도 활 꽃게를 저렴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싱싱한 활 꽃게를 사 오면 기분은 좋지만 역시나 손질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한 두해 해 본건 아니지만 자주 먹는 활 꽃게가 아니기에 할 때마다 새롭고 어렵다. 좀 더 수월한 방법 찾아보고자 인터넷에 ‘꽃게 손질법’을 검색해 본다. 눈에 들어온 방법 하나 펄펄 끓인 뜨거운 물에 활 꽃게를 잠시 담가 기절시킨 뒤 손질을 하라는 것이다. 어렵다. 어차피 급 냉할 놈들인데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물을 맞으니 파닥파닥 움직이는 게 들에게 “미안해, 미안해”하며 기존하던 방법대로 손질을 시작한다. 고무장갑을 끼고 솔로 박박 문질러 닦은 후 잘 먹지 않는 꽃게 다리의 끝을 잘라낸다. 손질 과정에서 후두두 떨어진 게다리는 따로 모아 냉동해 두었다가 각종 찌개의 육수를 낼 때 주로 사용하면 좋다. 손질하다가 힘 좋은 놈이 집게다리로 고무장갑을 집어내는 바람에 떼어내는 과정에서 장갑이 찢어져 버렸다. 대단하다. 그 정도로 싱싱하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다 손질된 게 들은 아직도 살아 다리를 움직인다. 어쩔 수 없이 급 냉을 시키려 냉동실로 직행한다. 이렇게 손질된 꽃게는 된장찌개에도 들어가고, 해산물 파스타에도 이용되고, 양념게장도 한번 무쳐 먹으며 한동안 실컷 꽃게를 즐길 수 있다.
오늘은 보리새우로 육수를 내고 토장을 넣은 꽃게탕을 시원하게 끓였다. 꽃게를 넣은 요리는 감칠맛이 워낙 뛰어나서 무엇이든지 알아서 맛을 낸다. 마지막 간은 참치꽃게액젓으로 한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니 저녁에 뜨끈한 꽃게탕이 딱 알맞은 메뉴가 되어 주었다. 간을 심심하게 해서 살이 달큰한 꽃게 본연의 맛을 더 즐길 수 있었다. 꽃게를 다 먹은 후 마지막으로 라면 사리를 넣고 먹는 꽃게라면도 별미이다.
안도현 시 속 꽃게가 간장 속 어스름을 받아들이며 알들에게 속삭였듯, 영화 속 엄마가 아이들을 재우며 마지막 위로를 건넸듯, 내가 끓인 꽃게탕 또한 시험을 앞둔 아이들을 향한 응원과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꽃게는 그렇게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가을의 맛과 삶의 이야기를 함께 품는다. 오늘 우리 집 식탁 위에 오른 꽃게탕은, 어느 가을 저녁 작은 시 한 편이 되어 조용히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