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by 지언 방혜린

2026년이 시작되고 1월도 훌쩍 지나가고 있지만, 나는 아직 2025년 13월을 살고 있는 듯했다.

2025년, 매일 새벽 5시 인문학을 공부하며 독서를 하고 도장 깨기 하듯 주워진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많은 도전과 경험을 했던 만큼 돌아보니 많은 마침표를 찍은 한 해였다. 그리고 그 마침표의 대미를 장식하듯, 지난 12월에 출간한 나의 첫 공저 ‘엄마의 유산’의 후속 활동으로 계획된 ‘위대한 시간’을 지난 토요일 마쳤다.

‘위대한 시간’은 ‘엄마의 유산’ 출간 후 북토크 형식으로 독자들을 만나는 행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을 쓴 작가이자 엄마들의 낭독극으로 꾸며보자는 어느 연출자의 제안으로, 계획에도 없던 연극 무대가 만들어졌다. 제안을 받은 뒤 본격적으로 준비해 무대에 오르기까지, 모든 일은 단 한 달 만에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책이 나온 것만 해도 신기한데, 연기라니. 내 평생 연극을 보러 혜화동 대학로에 가본 적은 있어도, 연극에 출연하러 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을 뿐인데 공연이 끝난 지금도, 하룻밤의 멋진 꿈을 꾼 것처럼 얼떨떨하다.

매일 낮 2시, 온라인 줌 앞에 모여 앉아 낭독 연습을 하며 우리는 울고 웃었다. 출근을 하고, 살림을 하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돌보며 틈틈이 화곡동과 혜화동, 성수동으로, 강화와 제주, 광주 등 전국 각지에 사는 작가님들이 모여 연습했다.


그 열정은 뜨겁고 농밀했으며, 진지하고 비장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열심이었나 떠올려보면, 기억도 희미한 여고 시절쯤이 아닐까. 어떤 목적이나 사리사욕도 없이 순수한 패기와 집념으로 똘똘 뭉쳐 연습했던 반 대항 합창대회나 무용대회가 문득 떠올랐다. 그게 뭐라고 아침 자습 전 30분, 점심시간 30분, 청소 시간 30분을 반납하며 매일 같이 연습해 결국 우승을 거머쥐던 우리.


그때도 지금도 ‘나’가 아니라 ‘우리’였다.

우리였기에 가능했고, 우리였기에 행복했다.

함께 울고 웃으며 준비한 결과를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꼭 그때와 같았다. 이 나이에, 이런 사람들과, 그 시절 여고생의 마음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다시 생각해도 그 시간은 1분 1초가 기적 같았다.


1월 17일, 공연을 하루 앞둔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낮 2시 줌 최종 연습을 마치고 나니 연극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허전하고 먹먹했다. 매일의 연습이 힘들고 지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만큼 가치 있었고 오래 남을 추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의 세포들이 먼저 알고 있는 듯했다.


공연 당일, 나는 총 세 번의 공연 중 오전 10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하는 일은 없어 보여도 괜히 분주한 연초에, 토요일 혜화동까지 아마추어 연극을 보러 오라고 초대하는 일이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조심스러웠다. 나만 해도 쉬고 싶은 토요일, 혜화동까지 연극을 보러 간다면 살짝 귀찮고 부담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들과 아들 친구, 남편이 와 준다고 했을 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아들에게 엄마의 진심을 전하고 도전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엄마의 유산’에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아들에게 ‘본질에 집중하고 파생된 것에는 무관심하며 삶을 주체적으로 믿고 살아가라’는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서 편지로 낭독해 줄 수 있는 엄마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특별한 기억이 언젠가 아들이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날 때 등을 힘껏 밀어주는 격려가 되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연극을 본 아들에게 내 마음은 잘 전달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가 또 하나의 장면으로 마음속에 새겨졌다.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지인들, 여고 동창들까지 찾아와 주어 더없이 가슴 벅찬 하루가 되었다.


가장 감사했던 건 무대에 오른 작가님들뿐 아니라, 연극에 출연하지 않으면서도 헌신으로 내 일처럼 도와준 작가님들의 손길과 마음이었다. 말보다 먼저 건네진 시간과 수고가 있었기에 이 공연을 무탈히 마칠 수 있었음을 안다.


그날의 나를 가장 멈춰 세웠고, 오래 추억으로 남은 건 무대 위가 아니었다.

꽁꽁 얼어붙은 손과 발이 괜찮다며 티켓 부스를 지키던 마음들, 따뜻한 대추차와 삶은 달걀, 한마음으로 공연을 응원하던 말들, 혜화동 맛집을 수배해 공수해 온 매 끼니. 그 모든 것이 있던 무대 뒤였다.


그 뜨거운 진심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이 여정이 결국 우리 모두를 더 단단한 사유와 조용한 연대로 이끌 것이라 믿으며, 나는 이제 비로소 2026년으로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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