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발레를 만나

by 서린

발레 이야기를 연재하는 내 브런치북의 제목은 ‘발레 고생길, 즐거움 주의’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또 다른 제목 후보는 ‘나는 어쩌다 발레를 만나’였다. 서른 후반에 발레를 만나, 아무도 시키지 않은 생고생을 자처하며 그 과정을 이상할 만큼 즐기고 있는 지금의 마음을 담은 제목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타이즈와 레오타드, 스커트까지 발레복을 빠짐없이 챙겨 집을 나선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출근을 할 수 있으면 발레도 갈 수 있다’는 나만의 신조 아래 어김없이 학원으로 향한다. 수업 전후로 발레복을 갈아입고,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빨래를 돌린다. 주 5회 발레를 하다 보니 빨래도 만만치 않아 손빨래는 진작에 포기하고, 이제는 '살아남는 놈(?)만 같이 간다'는 마음으로 비싸든 싸든 그냥 망에 넣어 세탁기를 돌린다. 다행히 세탁기로 빨았다고 사망하는 나약한 놈(?)은 아직 없었다. 발레를 조금이라도 잘하기 위해 해야 하는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 역시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 분명 귀찮은 일들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켜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아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돈을 준다고 해도 매일 이렇게까지는 못 했을 것 같다. 사랑은 귀찮음을 무릅쓰는 거라더니, 발레를 하며 그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의 힘으로, 나는 이 모든 귀찮음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




가끔은 상상해 본다. 만약 내가 20대에 발레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 시절의 발레는 거의 전공자의 영역이었고, 취미 발레라는 개념조차 희미하던 시기이긴 했다. 그래도 20대에 발레를 시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몸은 잘 따라줬을 것이고, 동작도 더 빨리 익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과중한 업무에 늘 찌들어 있었고, 개인적인 취미마저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아마 그 시절에 발레를 시작했어도 지금처럼 즐겁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결국 발레를 놓거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랫동안 쉬었을 가능성도 높다. 하고 싶은데 못하는 상황에 더욱 박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커리어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아이들도 자라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유가 생긴 지금 발레를 만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발레를 가장 즐길 수 있고, 내 인생에 발레가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만난 것이라고.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은 조금씩 단순해진다. 새로운 자극에는 무뎌지고, 웬만한 일에는 크게 기쁘지도, 크게 실망하지도 않게 된다. 좋게 말하면 단단해진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삶의 재미가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나이에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들썩이는 경험은 생각보다 더 깊게 다가온다.


발레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견디는 일이 훨씬 많다. 하루아침에 늘지 않고, 거울 속 나는 언제나 부족해 보인다. 발레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심정으로, 도를 닦듯 견뎌야 오래 할 수 있는 취미다. 한 보 전진하고 한 보 후퇴하는 일을 무한히 반복하는 느낌이지만, 한참 뒤에 뒤돌아보면 그래도 꽤 앞으로 와 있는 나를 발견하는 날이 온다.


스스로 한 단계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이나, 선생님에게서 예상치 못한 칭찬을 들을 때면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부풀고 기분이 좋아진다. 어른이 되면 칭찬을 들을 일도 거의 없는데, 나는 발레 수업에서 다시 칭찬과 격려를 얻는다.


다리를 조금 더 높이 들었다고, 빙그르르 잘 돌았다고, 발끝으로 서서 오래 버텼다고, 팔꿈치를 잘 뻗었다고 칭찬을 받는다. 이게 뭐라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런 걸로 칭찬받고 또 그 칭찬에 기뻐하는 내가 조금은 어이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여전히 성장 중인 나를 만나는 기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재미가 점점 줄어드는 나이에, 이렇게 단순하고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지만, 이 순간을 그저 즐기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어쩌다 발레를 만나 참 다행이라고.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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