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발레의 최고 덕목은 거울 속 나를 견디는 항마력

by 서린

12월 마지막 주, 아이가 다니는 발레 학원에서 쇼케이스가 열렸다. 쇼케이스라는 이름은 제법 그럴듯하지만, 실은 1년에 한 번 하는 학예회 같은 발표회다.


매번 수업을 듣던 작은 홀에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살짝 긴장한 아이들과, 그 앞에 놓인 접이식 의자들, 아이들보다 더 긴장한 얼굴의 어른들까지.


원래 리듬체조를 하던 둘째가 발레 학원을 다닌 지도 이제 1년 남짓이 되었다.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수업을 듣고 있을 뿐이라, 거의 매일 발레를 하는 발치광이 엄마 눈에는 아무래도 실력이 눈에 띄게 느는 것 같지는 않다.


쇼케이스를 앞두고 아이는 집에서도 연습을 했다. 지켜보는 사람은 엄마 하나뿐인데도 얼굴은 사뭇 진지하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몇 년 더 발레를 해온 ‘선배’의 눈에는 고칠 점이 자꾸만 보인다.


축다리는 끝까지 펴지지 않고, 파세는 완전히 턴인이다. 중심은 자주 흔들리고 팔꿈치는 아래로 내려가 있다. 하나하나 짚어 주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꾹 참느라 애를 먹었다.


짧은 안무를 끝까지 마친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엄마, 나 잘했죠?”하는 눈빛이다. 고쳐야 할 점은 여전히 많았지만, 작은 얼굴에는 그저 만족감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 모든 미완성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발레는 분명 사랑스러웠다.


턴인 축다리, 무너진 옆구리, 이상한 손... 그래도 예쁘다




그때 문득 선생님들이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틀려도 괜찮으니까, 당당하게 하세요.” 틀리고 조금 못하더라도 당당하면 보는 사람의 마음은 덜 불편해진다. 반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주춤거리거나, 모른다고 못한다고 민망해하면 보는 사람도 함께 긴장하고 불편해진다.


아이들은 틀림을 숨기지 않는다. 비틀거리면 비틀거린 대로,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다시 일어난다. 왜 나는 선생님처럼 못하지, 왜 다른 친구들보다 뒤처질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그저 따라 할 뿐이다.


반면 성인이 되어 시작한 취미 발레에서 가장 큰 적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취발러들 사이에서 “취미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거울 속 나를 견디는 항마력”이라는 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발레 학원에 들어서면 사방이 거울이다. 그 거울들은 잔인할 정도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비춘다.


어디서 본 건 많아서 눈은 이미 세계 정상급 발레리나를 향해 있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은 오랑우탄이나 갓 태어난 망아지 같다. 동작의 이름과 원리는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특히 센터에서 음악을 타야 할 때면, 발보다 먼저 마음이 굳어 버린다. 틀릴까 봐, 어색할까 봐, 혼자만 박자를 놓칠까 봐.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자꾸만 훔쳐보듯 힐끔거리게 된다. 아는 게 많은 만큼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드는 이상한 악순환이다.




아이가 넘어지면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넘어질까봐, 우스꽝스러워까봐 두려워 움츠러든다. 우리 선생님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일단 해 보세요. 틀리기밖에 더하겠어요?”


내가 돈 받고 공연하는 무용수도 아니고, 돈 주고 배우는 학생인데 틀리는 걸 두려워한다는 건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어찌 보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드는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이의 쇼케이스 영상을 친정 어머니에게 보냈더니 "너 발레하는 영상은 없냐?"고 물어보신다. 손녀보다 더 오래, 더 자주 발레를 한다는 딸의 발레는 어떤지 궁금하신가 보다. "저는 이런 작품은 안하고 그냥 수업만 들어서 영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사실 거짓말이다. 지난 달부터 작품반을 시작해서 처음으로 탈리스만을 배웠고 그 영상이 있다. 하지만 차마 누군가에게 보여주지는 못하겠어서 결국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가 발레하는 모습이 궁금하다는 남편에게도 한번도 보여준적이 없다.


나는 왜 내가 하는 발레가 부끄러울까? 아이의 얼굴에서 보았던 그 뿌듯함과 만족감을, 나는 언제 느껴봤을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틀림을 부끄러움으로, 미숙함을 결핍으로 배워 왔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올해는 나도 나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 내려놓고, 조금 더 뻔뻔하게 발레를 해보려 한다. 취미 발레 연차가 쌓일수록 느는 건 실력보다 뻔뻔함이라더니 다들 이런 과정을 거쳐 뻔뻔해지나보다.


내 브런치에 두번째로 등장하는 나의 인생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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