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산돌배를 추억하며...
산과 들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먹거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보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모른다. 나도 시골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시골에 가는 것은 1년에 고작 서너 번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이 우리에게 주는 먹거리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다. 버섯류, 과일류, 약초류, 산나물 같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을 보면 버섯류는 송이, 능이, 표고, 꾀꼬리, 싸리, 느타리, 석이, 곰, 노루궁뎅이, 목이, 영지 등이 있다. 과일류는 머루, 다래, 참배, 돌배, 오미자, 밤, 도토리, 잣 등이 있다. 생각보다 과일류는 기억이 많이 나지 않는다. 약재류는 산삼, 더덕, 도라지, 잔대, 시신, 뇌신, 삽추, 하수오, 백수오, 적수오, 만삼, 봉녕, 작약, 칡 등이 있다. 나물류로는 참나물, 얼레지, 곰취, 명이, 떡취, 뱀취, 미역취, 개미취, 냉이, 다래순 등 이 있다. 여기 적은 것 외에도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내가 이런 많은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내가 이런 많은 것들을 알게 된 것은 따로 공부를 해서도 아니고, 약재상이나 나물 판매를 해서도 아니었다. 어릴 적 내가 산을 좋아해서 산에서 놀다 보니 자연적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 주말이 되면 등에 배낭을 하나 메고 낫과 지팡이를 들고 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무엇을 채취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으로 간다. 길도 없는 산을 이리저리 돌다 보면 눈에 띄는 뭔가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버섯류가 될 수도 있고, 약초류가 될 수도 있다. 과일이 보이면 과일을 가지고 올 수 있을 만큼 따면 되니 부담이 없다. 산을 누비다 산돌배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다. 돌배는 계란보다 약간 큰 정도 사이즈의 야생 배로 덜 익었을 때에는 단단해서 이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맛은 아무 맛도 없는 입만 떫은 못 먹는 과일이다. 그런 과일을 왜 고생하면서 찾아다닐까.
산돌배나무를 만나면 주변에 돌이 많은지 적은 지 살펴본다. 돌이 많으면 돌배가 떨어지면서 깨져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확인을 해서 헛수고를 줄인다. 돌이 없다면 가늘고 긴 나무막대를 하나 준비새서 나무를 오른다. 열린 산돌배를 나무막대를 이용해 '탁' '탁'쳐서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먼 곳에 있는 배는 발로 흔들고, 손으로 흔들고 하면서 떨어트린다. 나무를 흔들면 배나무에서 배가 '후두두둑~' 하며 떨어져 내리는데 그 소리도 듣기가 좋다.
바닥에 널려있는 산돌배를 주워 배낭에 담는다. 터진 배는 버리고 안 터진 배를 골라 담는다. 배가 단단하기에 돌 같은데 떨어지지 않은 이상 크게 터지지는 않는다. 보통 나무 하나에서 배낭 하나 정도는 나온다. 다 주워 담은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한다. 더 이상 뭔가 있어도 가져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면 산돌배를 큰 대야에 물을 받아 씻어 바구니에 담아 놓는다. 햇빛에 반사되는 산돌배는 껍질이 초록색에 검은빛을 띠는 것이 흡사 곰팡이가 핀 듯 그런 무늬가 연출된다. 살짝 물기가 마르면 항아리에 산돌배를 깔고 왕겨를 한 줄 깔고 하는 방법으로 담는다. 왕겨가 없다면 그냥 항아리에 산돌배를 담아도 크게 문제는 없다. 그렇게 한동안 항아리에서 묵으면 산돌배는 말랑말랑 해지는 숙성과정을 거친다. 색도 초록색에서 살짝 노란빛을 띠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검은빛으로 변하며 돌배 특유의 달콤한 향도 베어 나온다.
잘 익은 산돌배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배어 물면 새콤하면서도 달착지근 한 배즙이 입안 가득 퍼진다. 더불어 돌배 특유의 향이 풍겨나 그 맛의 깊이를 더해준다. 작지만 강력한 돌배의 마법에 빠지는 이유다. 그 맛을 보고 나면 다음 해에는 나도 모르게 산돌배나무를 찾게 된다. 그만큼 숙성된 산돌배는 맛이 기가 막히다.
어른들은 산돌배를 숙성시켜서 술을 담근다. 숙성된 산돌배를 담금주 담는 병에 넣고 다른 것은 첨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술을 부어 가득 채운다. 1년을 푹 삭히면 술에서 돌배의 맛과 향이 베어 나오고, 술의 쓴 만은 줄어들어 그 맛이 기가 막히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는 술을 배우지 못했기에 맛을 못 본 것이 아쉽지만 내 기억 속 돌배 술의 향기는 내가 먹고 싶을 만큼 좋은 향이 났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돌배를 검색해 본다. 혹시 나는 역시나를 부른다는 말이 정답인 듯하다. 내 어릴 적 산돌배는 보이지 않고 개량종 같이 생긴 돌배들이 자연산 돌배라고 불려지며 판매가 되고 있다. 내 기억 속 산돌배는 이제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아직 인터넷 상에 사진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세월이 이만큼 지난 지금, 나는 그 시절의 산돌배에 대한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산돌배를 찾으려면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산돌배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 든다. 만약 산돌배를 지금 찾는다 해도 내 어릴 적 그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세상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입맛이 그 시절 그 맛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산돌배의 그 맛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어 진다.
※. 산돌배 사진을 구하지 못해 그냥 배와 배나무를 올려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