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지는 회색 하늘과 싸늘함 가운데 왠지 포근함을 가진 날씨가 왠지 한바탕 눈이 내릴 것 같다. 유년의 기억으로는 이런 날에는 꼭 눈이 내렸다. 더구나 포근한 기분이 드는 날에는 함박눈이 어김없이 내렸던 기억이 난다. 솜털처럼 하얀 눈이 바람을 타고 내리는 모습이 때로는 세상에 이블을 덮어 주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서 기르던 흰색 진돗개가 한 마리 있었다. 요즘은 강아지를 키우면 이름도 지어주고 했지만 그 당시에는 강아지 이름을 따로 지어주지 않았다. 그저 쉽게 흰색이면 백구, 검은색이면 검둥이 정도로 불렸다. 집에서 기르던 개는 흰색이기 때문에 국룰처럼 이름에 대한 의견 교환도 없이 그냥 백구로 불렸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세상이 온통 하얗게 백지가 되어가는 시간에 백구와 온 동네를 한 바퀴 뛰어다녔다. 입에서 하얗게 내뿜어지는 입김도 좋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을 받아먹는 재미도 있었다. 경사지를 올라가 눈을 뭉쳐 아래로 내려 굴리면 엄청나게 큰 눈덩이가 생겨나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었다. 옷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머리에 하얗게 녹아내리는 눈마저도 재미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감기 걸리게 눈 맞고 돌아다닌다며 꾸지람을 들을 줄 알면서도 신나게 뛰어놀았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빨갛게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면서 백구와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 백구에게 밥을 주려고 부엌으로 나왔는데 백구가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백구를 부르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가도 어느 순간 뛰어와 꼬리를 흔들던 아이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도 않고 백구의 짓는 소리조차 없다.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 장난치며 같이 돌아왔는데, 밥 먹을 시간에 백구가 없었던 적이 없었는데, 백구는 보이지 않았다. 온 식구가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혹시 들짐승을 보고 따라갔을 수 있으니 기다려 보자고 하셨다. 간혹 그런 일이 있긴 했으니 걱정이 됐지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도 백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백구가 없으니 집이 허전한 마음마저 들었다. 놀다가도 혹시 백구가 밥이라도 먹었을까 개밥그릇을 살펴보곤 했지만 역시나 그대로 흔적조차 없다. 산에서 길을 잃었던가 아니면 동물에게 잡혀 먹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지쳐갈 때 어머니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소향아~! 백구가 왔어!!"
"진짜요?"
나는 소리치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그동안 밥 한 끼도 먹지 못한 듯 비쩍 마른 백구가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백구의 목을 끓어 안았다. 백구도 기분이 좋은지 내 살을 혀로 핥았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죽었는 줄 알았잖아."
백구는 대답 대신 연신 꼬리만 흔들고 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픈지 밥그릇이 있는 곳으로 가서 나를 쳐다본다. 백구가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아 오래된 밥그릇을 비워 놨기 때문에 텅 빈 그릇에는 먹을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춥고 배고플 백구를 위해 따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백구의 그릇에 가득 담아 줬다. 백구는 허겁지겁 쉬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백구는 털이 온통 흙투성이에 너무도 초췌해 보였다. 하긴 일주일 만에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밥을 다 먹은 백구를 따뜻한 아궁이 앞으로 데리고 가서 흙도 털어주고 따뜻하게 누워있도록 했다. 그런데 백구는 뭔가 불안한 듯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잠시 앉아있던 백구는 금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급하게 쫓아 나갔으나 이미 백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도 백구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상하다며 형에게 백구가 밥 먹으러 다시 오면 몰래 뒤를 따라가 보라고 일렀다. 어머니의 짐작이 맞았는지 백구는 다음날 밥때가 되자 나타났다. 그리고는 밥을 먹고는 잠시 머무르는 듯하다가 밖으로 나간다. 형이 기다리고 있다가 백구의 뒤를 쫓아갔다.
한참 뒤에 형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백구가 산에서 굴을 파고 새끼를 3마리나 낳았다고 한다. 형의 말에 의하면 가을에 송이밭에 백구를 데리고 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송이밭 아래쪽 커다란 소나무 뿌리가 튀어나온 곳에 부드러운 흙을 파내어 굴을 만들고 그곳에서 출산을 했더라는 것이다.
백구가 가출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굴을 파고 새끼를 낳고 안정이 될 때까지 새끼들을 살피느라 배고픔도 참고 그 오랜 시간을 굴속에서 보냈던 것이다. 참고 견디다 결국 앙상한 가죽만 남았을 때 집으로 돌아와 밥만 먹고 다시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위치를 알고 난 후 백구를 데리러 형들과 함께 산으로 갔다. 굴 앞에 다다르자 백구가 나와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내가 다가가자 백구는 동굴로 들어가려고 했다. 서둘러 백구를 잡고 진정을 시키는 사이 형들이 강아지를 꺼냈다. 귀여운 강아지 3마리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것이 건강해 보였다. 형들과 강아지를 나눠서 앉고 산을 내려오는데, 백구도 집으로 가는 것을 알고나 있다는 듯 앞장을 선다.
집으로 돌아와 개집을 부엌 아궁이 근처로 옮겨주고 천을 새로 깔아 보금자리를 만들어 줬다. 올망졸망 모여드는 강아지들을 백구는 묵묵히 품어 안는다. 백구와 강아지들이 꼼지락거리는 게 그렇게 예쁘게 보였다. 백구의 그런 모습이 자식을 위해 희생하시는 어머니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혹시나 새끼들한테 해가 될까 걱정이 돼 산에 올라가 굴을 파고 그곳에서 새끼를 낳고 음식도 마다하고 새끼를 돌봤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은 흰색 개를 보면 가끔씩 백구의 이야기를 한다. 일명 "백구 가출사건"이라 명명되어 그렇게 우리들의 추억이 되었다. 새끼들을 무척이나 아끼던 백구는 아직도 내 기억에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