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둘째 딸아이가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친구들에게 인사도 없이 뛰어 온다.
"**야! 넘어진다. 뛰지 말고~ "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조수석 뒷문을 열고 부리나케 차에 오른다.
차에 타자마자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재잘재잘 하루 일과를 속사포 쏘듯이 털어놓는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차를 출발시켰다.
말하는 사이에 "응." "그랬어?" 하는 맞장구만 쳐주며 운전하는데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다.
신호대기에 걸려 차를 정차하면서 룸미러로 바라본 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오랜만에 아빠가 자기를 데리러 온 것이 그리도 좋은 것인지, 아니면 아빠가 사주는 군것질 거리나 장난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딴에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인다. 나도 저렇게 티 없이 맑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면서 해맑은 딸의 얼굴 위로 어렴풋이 떠 오르는 6월이, 세상을 삼킬 듯 쏟아지던 비가 겹쳐지고 있었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기억
저녁 어스름에 목청 높여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향아 저녁 먹어라~!!"
까맣게 그을린 꼬맹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나고, 재차 부르는 소리에 체념하듯 손에 든 자치기 나무를 집어던지며 대답을 한다.
"네, 갈게요~"
서둘러 돌아온 집에는 벌써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여 손 씻고 밥 먹자."
나는 귀찮은 듯 냇가로 가서 대충 손과 얼굴을 씻고는 양손에 묻은 물을 툴툴 털며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저녁은 아버지가 평소에 좋아하시던 국수였다. 노는데 정신 팔렸던 나는 그제야 허기가 몰려와 허겁지겁 국수를 먹는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국수를 반도 채 못 드시고 젓가락을 내려놓으셨다.
"좀 더 드시지 그래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하시며 남은 국수를 드시려는 듯 그릇을 집어 들으셨다.
"내가 조금 있다 먹을 테니 그냥 놔두게"
아버지는 어머니의 의도를 아시는 듯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래요, 그럼 좀 쉬었다 마저 드세요."
하시며 국수 그릇에 뚜껑을 덮어 아버지 머리맡에 두셨다. 평소 음식이 남으면 늘 어머니가 그릇을 비우셨는데 그날따라 아버지의 그 말씀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도 더 많이 놀고 싶었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밖에 나가 형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며 놀다가 들어와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아랫목에 반드시 누워계셨고, 어머니는 그 앞에서 통곡을 하고 계셨다. 눈뜬 채 멍하니 앉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온 식구들이 다 울고 있었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뭔가 가슴에 커다란 알 수 없는 무거운 기분과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들에게 이웃에 알리라고 하셨고, 형들은 부산히 움직였다.
다음날 동네 사람들이 새벽부터 모여들어 천막을 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방에서는 울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고, 사람들이 계속 왔다 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었고, 놀아주는 사람도 없어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아무도 놀아 주시도 않는데 심심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후가 되면서 하늘도 슬픔에 더는 참지 못했는지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집 앞에 시냇물은 검붉은 흙탕물이 점점 늘어 마당 근처까지 차 오르며, '우르릉 구르릉'소리를 쉴 새 없이 부르짖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비와 상관없이 부산히도 움직이고, 뭔가 바쁜 일정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동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아버지 상여를 메고 나갔다. 다행히 상여 나가는 날은 비가 그쳤다. 사람들은 여전히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당 앞 배나무에 기대어 아버지의 상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만 보았다. 집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갑자기 집이 허전해지고, 왠지 모를 무서움이 엄습해 배나무를 있는 힘껏 꽉 끌어안고 있었다.
사진출처:Pixabay사고, 예정된 일이었을까?
다치기 전에 장교로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처음부터 직업군인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일반 사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시던 중 장교 선발 시험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버지는 좋은 점수를 받으셨고, 장교로 임관하여 직업군인이 되셨다고 한다. 군생활을 몇 년 하셨는지 는 알 수 없으나 꽤 오랜 기간을 군 생활하셨던 것 같다.
훈련이 있었던 어느 날,
아버지가 탄 차량이 갑작스러운 브레이크 고장으로 멈추지 못하고 절벽을 향해 달리고 있어 이대로는 죽을 것 같은 생각에 차에서 뛰어내리고는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고 한다. 큰 부상으로 군인병원에서 몇 번의 수술을 했으나 결과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어 퇴원이 결정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의가사 제대를 하셨고, 훈장 대신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옆구리 쪽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피고름이 흘러내려 흰 천을 항상 두르고 계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흰 천을 바꿔줬지만 상처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자리에 누워 계시는 날이 점차 늘어 갔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몸에 좋다는 것은 모두 찾아다니며 간호를 해 드렸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환은 계속 악화되어만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 순간순간이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신음도 없이 얼굴 한 번 안 찡그리고 무덤덤하게 매일을 버티고 계셨다. 그렇게 고통 속에 지내시던 아버지는 내 나이 여섯 살 6월 25일을 일기로 아픔 없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 그렇게 별이 되셨다.
어리광 부리고 철없이 굴었을 여섯 살,
내 기억 속에는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여섯 살의 다른 날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데 그날의 기억은 온통 하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속 깊이 지금껏 곰삭혀 온 6월의 비는 늘 내 가슴에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슬픔은 시간이 약이다 했던가? 그러나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그날의 기억은,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의 상여를 바라보던 그 눈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했던 어린 날의 슬픔이 그렇게도 강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그 후로도 아버지의 부재는 내 삶 곳곳에서 재발하는 슬픔이 되었고, 한이 되어 그날에 흘리지 못했던 눈물의 양 보다 더 많은 눈물을 가슴으로 흘리며 살아야 했다. 때로는 아픔도 되었다가, 때로는 고된 삶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가 하는,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