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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將棋)

유년시절의 기억

by 소향

시간의 기억은 상실한 채 아버지와의 추억 한 자락만 떠돌고 있는 기억이 있다. 아마도 5~6살 즈음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 그 기억의 파편을 잃어버리지 않고 떠올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크게 없는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집에 전화도 없던 시절, 몸도 불편하신 아버지는 이상하리만큼 정확한 감(?)을 가지고 계셨다. 아침에 식사를 하시는 도중에 뜬금없이 "오늘 손님이 오실 것 같다. 마당도 좀 깨끗이 쓸어 놓고 해라."라는 말씀을 하시면 영락없이 그날은 손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신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신기를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리도 잘 맞출 수 있는지 마냥 신기해했었다.


그날도 아버지의 예측은 벗어나지 않고 먼 곳에서 손님이 오셨다.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고 시간이 지나자 두 분이 장기를 두셨다. 아버지는 손님이 오시면 종종 장기를 두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옆에 가만히 앉아 장기판으로 빠져 들었다. 누가 장기를 가르쳐 주거나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장기를 두는 사람들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저 장기알의 움직임만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래도 계속 보다 보니 기물(장기알)이 종류별로 움직이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어떻게 그 거리를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는 거리를 알기 때문에 장기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장기를 두고 계시는 손님 사이에서 장기판을 바라보던 나는 그만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내 눈에는 보이는 묘수가 아버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알려주고 싶었지만 괜히 나섰다가는 어른들한테 야단만 맞을게 불보듯 뻔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엉덩이만 들썩거렸던 것이다. 결국 그 판은 손님이 이겨서 나는 그만 기분이 상했다. 내가 아는 수를 가르쳐드리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니 더 아쉬웠다.


다음 날이 되자 손님은 떠나고 집에는 덩그러니 나와 아버지만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뭔가 심부름시킬 것이 있으시면 부르곤 하셨기 때문에 대답하고 얼른 달려갔다. 그런데 심부름이 다른 날과는 달랐다. 나보고 장기판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던 것이다. 속으로 '손님도 안 오셨는데 왜 장기판을 가져오라고 하시지?' 하며 장기판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보고 장기 한판 두자고 하셨다.


사실 아버지는 장기 두는 법을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고, 형들도 장기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를 몰라서 두지 않았었다. 나는 어깨너머로 이미 장기의 룰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장기를 두고 싶었지만,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어머니가 누누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고는 장기를 두자고 하신 것이다. 나는 혹시나 아버지 마음이 바뀔까 싶어 재빨리 장기판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갔다.


장기판을 펼쳐놓고 아버지는 장기알을 놓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모양대로 그대로 놓자, 아버지는 아무 말 않으시고 나에게 시작하라고 하셨다. 한 수 한 수 고민을 하면서 장기를 두었다. 아버지는 내가 두는 장기에 별말 않으시고는 계속 장기를 두셨다. 중반이 지나고 결말을 향해 치닫는 장기판에는 미묘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하나남은 아버지의 차를 잡으려고 할 때 아버지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잠깐만~!"을 외치셨다. 그러시면서 한 수만 물러달라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는 절대 안 된다고 장기판에서 무르는 일은 없다고 우겼다. 결국 처음 장기를 둔 날 나는 아버지를 이기고 말았다.


그 후 아버지는 심심하실 때면 나를 불러 장기를 두곤 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두는 장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승패는 거의 반반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와 장기를 두는 시간은 왜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꼭 한 두 판 두면 아버지는 힘들다 하시면서 그만두자고 하셨으니 말이다. 아쉽지만 떼쓸 수 없음을 알기에 조용히 장기판을 접곤 했다. 그럴 때면 뭔가 허전함에 마당을 나와 시내를 건너 매여있는 소에게 풀 한 줌을 집어다 주었다. 그리고는 소의 눈 사이를 손으로 쓸어주면 소는 눈만 끔벅끔벅 거리며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여전히 되새김질하는 소의 임이 오물거리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훗날 어머니는 그날의 일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는 나를 보며 "소향이는 나중에 크면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겠다." 하셨다고 하신다. 장기를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어깨너머로 터득한 것과 동물들을 거두는 것이나 여러 가지 면을 보아 그럴 것이라는 추측이셨을 것이다. 물론 그 속에 내포된 다른 의미도 있었겠지만 그것까지 들춰내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그렇게 어깨너머로 장기를 배우고 아버지와의 일전으로 갈고닦은 장기 실력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동네 아저씨들과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장기를 두면 아저씨들은 길이 잘못됐다면 계속 지적을 하신다. 그제야 내가 어깨너머로 배운 장기알의 길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칸수만 짐작으로 장기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장기를 잘못 두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내가 틀렸다고 말하면 상처 받을까 싶은 마음에 모른 척 넘겨 주시곤 하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셔서 내가 그런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틀렸다고 지적하며 상처를 주기보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주면서 내가 성장하며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아저씨들과의 일전으로 장기알의 정확한 길을 배우고 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기를 두어 누구에게 크게 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 중 장기를 가장 잘 둔다는 친구도 나에게 한 판을 이기지 못했고, 장기를 잘 둔다는 동네 어른들 마저도 나와 장기를 두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었다. 사람들에게 나는 장기의 고수로 기억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백지에 가까운 나에게 있어 장기는 아버지와의 기억이 남아 있는 가장 긴 추억의 시간 중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떠 올릴 때면 늘 그날의 기억이 먼저인 것은 그날의 아버지가 나에게 베풀어주신 보이지 않는 마음, 장기를 둘 줄 알면서 장기 두자는 말조차 하지 않는 나를 생각해주시고, 내 마음까지도 배려를 하시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손때 묻은 장기알과 희미해져 가는 장기판의 까만 선들이 쌓아놓은 시간의 흔적들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그렇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 화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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