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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가던 날

아픈 유년의 기억 속으로

by 소향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으레 아버지께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서야 다른 뭔가를 했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자식이 집 밖으로 나가면 어디를 가는지 알리고, 다녀와서는 잘 다녀왔다는 말을 꼭 들으셔야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집 앞에서 놀아 들어오는 아이에게도 꼭 문안을 하게 해야겠어요?" 하시며 자식들 불편할까 볼멘소리도 하시곤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묵묵히 자식들에게 문안을 강요했고, 그 덕에 여섯 살 나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 빈자리에 꼬박꼬박 출입을 고했다.

살아 계실 때에는 "오냐~" 아니면 "별일은 없고?" 하시던 아버지가 지금은 아무런 대답조차 없다.

뒤돌아 서던 나는 아무 대답 없는 아랫목이 허전하여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방에 들어가 아버지 누우셨던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어 보기도 했다.


큰아버지의 배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래지 않아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불란의 원인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 문제가 되었다.


아버지는 의가사제대를 하면서 약간의 보상을 받았다.

그 돈으로 집과 땅을 구입하려고 하자 큰아버지가 나서시며

"몸도 불편하니 내가 집과 농사지을 땅을 사 줄 테니 너는 집에 가만히 있거라."

하시며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 집과 농지를 사셨다.

"내가 집하고 땅을 싸게 잘 사놨으니까 이사해라."

하시는 큰아버지의 말에 따라 부모님은 이사를 하셨고, 다음 해부터 어머니는 농사를 지으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구입한 부동산의 명의를 큰아버지 본인 이름으로 거래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언성이 높아졌고, 큰아버지는 곧 명의를 바꿔 주겠다고 기다리라 하시고는 차일피일 미루었다.


다른 아버지의 형제들이 있었지만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끌어왔고, 큰아버지가 명의를 넘겨주기도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채 반년이 지나가도 전에 큰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와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벌쩍 뛰시며 큰아버지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큰아버지는 적반하장으로 그럼 법대로 해보라며 안 비워주면 팔아버리겠다고 큰소리쳤다.


1년이 넘게 큰집과의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에는 큰아버지가 우리 집과 농지를 팔아버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만에 우리는 고향을 등지고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사, 그리고 또 다른 시작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시냇물이 얼어 녹기도 전에 그 위로 물이 넘치면 또 얼음이 얼고 하면서 얼음이 범람하는 현상이 생겼다.

그릇에 물을 담아 방문 앞에 놓고 아침이 되면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어머니는 우리와 거처할 집을 구하기 위하여 읍내를 수시로 나가셨다.


봄이 오는 3월의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하는데 어머니가 말문을 여셨다.

"집은 좀 허름한 듯해도 땅도 3천 평 정도 되고 우리가 먹고살만한 땅이 있어 샀다."

"집 옆에 복숭아 과수원도 조금 되고, 딸기 밭도 있더라."

하시며 참 다행이란 듯 어머니는 이사를 가자고 하셨다.


이삿짐을 싸던 날.

그렇게 담대하게 버티고 계시던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

아마도 너무도 억울하고 하소연할 곳도 없어 눈물로 한을 달래시는 것이리라.

그렇게 하루를 꼬박 눈물로 이삿짐을 싸고 저녁이 되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한자리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가 몸과 바꾼 이 땅을 너희 큰아버지가 뺏어 가셨다."

그리고는 또다시 한 차례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앞으로는 너희 아버지 형제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도 그렇게 알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아버지 형제들에게 보란 듯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라"

그렇게 당부를 하시고는

"내가 너희들 앞에서 눈물은 안 보이려 노력했는데 오늘은 참지 못했구나." 하시며 미안해하셨다.

연약한 여인이자만 자식 앞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으셨나 보다.

그 뒤로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들었다.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집을 떠나야 한다는 서운함에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뒤척이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잠을 잤을까 잠결에 들리는 노랫소리에 눈을 떴다.

어머니가 잠을 못 주무시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으나 무척이나 슬프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신 듯 어머니는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을 뜨자 벌써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고, 형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빨리 아침 먹고, 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자."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나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산소는 우리 집이 잘 내려다 보이는 산아래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간단하게 음식을 챙기신 어머니를 따라 산소를 향했다.

경사도 그리 가파르지 않은 언덕인데 그날따라 계속 미끄러져 넘어졌다.

"소향아, 조심하거라"

어머니의 말씀에 조심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겨우 도착한 아버지 산소에 절을 했고, 어머니는 산소를 이곳저곳 어루만지시면 뭐라 말을 하셨다.

우리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산소를 한 바퀴 도시고는 우리가 사는 집과 우리가 농사를 짓던 농지를 찬찬히 훑으시며 바라보신다.

아마도 마음에 새겨 넣으시려는 듯....


집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삿짐을 챙겨 길을 재촉했다.

짐을 어떻게 옮겼는지는 기억이 없고, 점심때쯤 우리는 새로운 집에 도착했다.


새로 살아갈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정이 가든 듯했다.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마루에 걸터앉아 이곳저곳을 바라본다.

왼편에 부엌이 있고, 외양간이 있었으며 마루를 통하면 안방과 건넌방으로 열결 되어 있었다.

뒷마루를 통하면 작은 방이 하나 더 나와 방이 총 3개인 집이었다.

새집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정갈하게 지어진 아담한 집이었다.

마당을 지나면 아름드리 가래나무가 있었고, 왼편에는 커다란 대추나무가 서너 그루 자리를 잡고 있다.

집 뒤편에는 앵두나무가 있었고, 장독을 놓았던 자리인 듯 돌로 쌓아 만든 조그만 공간이 보였다.

오른쪽 옆에는 복숭아나무가 30여 그루 심겨 있었고, 딸기 밭이 꽤 크게 형성이 돼 있었다.


전에 살던 집 보다도 왠지 더 좋아 보였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도 반가운 듯 순백의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앞으로 닥쳐올 일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으니, 그때의 기분만큼은 그랬다.

이사.png

이미지 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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