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도록 파랗게 물든 하늘, 그 사이로 문득 유년의 기억 한 자락 훅 끼어들어온다. 그리 유쾌하지도 않을 그 추억이 어쩌다 저 파란 하늘 사이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시간이다. 오후의 식곤증에 어느새 잠들어 꿈을 꾸고 있을 것 같은 생생한 기억이 조각조각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 엄마는 장에 팔 물건을 한 보따리 챙겨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그것도 모자라 양손 가득 들고 대문을 나섰다. 길은 어둠에 쌓여 구분도 가지 않을 만큼 시야는 좁지만 오랜 세월 오고 간 기억으로 그 길을 겁도 없이 한 발 한 발 암흑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달그락 소리에 부스스 선잠 깬 눈으로 바라보던 어린아이는 어둠이 무서워 눈만 꿈벅거린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뚫어져라 바라보지만 잠자는 아이 깬 줄 모르는 엄마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무심하게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차마 불러보지 못하고 그렇게 엄마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어둠에 잡아 먹혔을까 봐 겁먹은 아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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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떠서야 소스라치게 놀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새벽 엄마를 삼킨 어둠에 겁먹고 이불 뒤집어쓴 채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배가 고팠다. 집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형들은 학교를 갔을 것이다. 이미 익숙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기진 배를 달래러 부엌으로 간다. 집이 비어 있을 때면 항상 배고플 때 챙겨 먹으라며 밥상에 밥과 반찬들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나가셨기에 당연한 마음으로 부엌으로 갔다.
밥상을 엎어 놓았던 덮개를 젖히자 밥상에는 밥이 없었다. 밥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상이 비어 있었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배가 고팠다. 정말 통곡하듯 울고 싶었다. 그래도 울지 못했다. 아니, 울어도 봐줄 사람이 없기에 운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허기진 배를 달랠 요깃거리가 필요했다.
마루에 나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은 유난히도 파란 하늘이 시리도록 아파 보였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는 뭐든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당 오른쪽 코너를 돌면 딸기밭과 복숭아 과수원이 있다. 그러나 딸기는 아직 익지 않았고, 복숭아는 높이 매달려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딸기밭을 지나 오이밭으로 들어간다. 오이라도 따먹자는 심산이다. 이리저리 살피니 살짝 노랗게 익으려는 오이가 서너 개 보였다. 그중 제일 큰 놈을 하나 골라 손으로 잡고 비틀어 돌렸다. 꼭지는 금방 떨어졌다. 나는 그 오이를 씻어 먹어야 한다는 말을 늘 들어왔기에 다시 시냇가로 갔다. 얕은 물이 졸졸 흐르지만 1급수라 그냥 마셔도 되는 맑고 깨끗한 물이 집 앞에 흐르고 있었다. 배고픔도 잊은 듯 오이는 옆에 두고 맨발로 물속에 발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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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물모래의 촉감이 뼛속까지 들어와 등줄기를 타고 뇌까지 전달되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도 기분 좋게 모래 속을 누비며 장난을 치고 한참을 놀았다. 다시 찾아온 허기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오이를 들고 맑은 물에 씻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터지는 오이의 시원한 물맛이 기분이 좋았다.
아이는 그렇게 오이를 한 개 다 먹고 나서야 급한 허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더 놀던 아이는 이내 싫증이 났는지 다시 집으로 들어가 마루에 걸터앉는다. 엄마가 언제쯤 오시려나 마루 위에서 까치발을 들고 저 멀리 바라 보이는 길모퉁이를 응시한다. 여전히 엄마는 보이지 않고 놀러 나온 다람쥐만 돌담 위를 들락거리며 무얼 그리도 먹는지 두 앞발을 오므려 오물거리고 있다.
"나도 배고픈데~!!"
"엄마~~~!!"
들리지도 않을 엄마를 크게 불러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힘없이 마루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을 빙글빙글 돌리며 무료함을 달래 본다.
"아가야~!!"
엄마의 부르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엄마다!!!"
"엄마~~!"
기쁜 마음에 엄마를 부르며 달려 나가 엄마품으로 뛰어든다.
"배고프지?"
"응~"
"조금만 기다려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응. 알았어~"
엄마의 품에선 포근한 엄마 냄새와 섞인 땀냄새가 짙게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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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보따리를 풀러 정리하고 식빵을 집어 들었다. 계란을 풀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식빵을 대각선으로 잘라 삼각형을 만들어 계란에 적셔낸다. 프라이팬에 식빵을 올리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기름 소리에 아이는 침이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노랗게 익어가는 식빵이 하나 둘 바구니에 올려지고, 엄마는 하얀 설탕가루를 솔솔 뿌려 낸다. 하얗게 내려앉은 눈이 녹아 스며들 때 접시에 담아 포크를 들려주며 먹어보라고 한다.
아이는 그렇게 맛있는 식빵은 처음 먹어봤다. 이전에도 분명히 그 빵을 먹어 본 기억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다. 뜨거운 식빵을 호호 불면서 몇 개를 먹어 치웠다. 체한다고 물 마시며 천천히 먹으라는 엄마의 말은 귀에 드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나서 배를 두드리며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입안에 도는 달콤함과 배부름 사이에서 행복이 웃고 있었다.
새벽부터 무서움에 긴장했고, 깨어서는 외로움에 슬펐고, 밥상 앞에선 배고픔에 절망했던 어찌 보면 아이 인생 최대의 슬픔을 겪은 날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빵의 달콤함을 맛본 기분 좋았던 날이기도 했다.
아이는 마루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엄마를 가만히 불러본다. 어렴풋이 저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따뜻한 햇살이 아이를 포근히 덮어주고 자장가를 속삭여 주고 있었다.
그날 엄마가 밥상을 차려놓지 않고 장 보러 가신 이유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 뒤로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깜빡 잊고 가셨으리라 짐작만 하고 있다. 장 보러 간 후에야 알아차리고는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셨을 것 같다. 배고플 아이를 위해서 땀이 흠뻑 젖도록 서둘러 돌아오셨을 것이다. 보통은 오후나 돼야 돌아오실 장보는 날인데 점심이 되기 전에 돌아오셨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