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기억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든 시골의 새벽은 자욱한 안개로 시작되었다. 산으로 향하는 오솔길에는 풀잎에 맺힌 이슬이 촉촉이 신발을 적시고, 발등에 내려앉은 풀씨가 영역을 넓혀가는 시간이다. 오솔길을 지나 산을 오르는 8개의 발자국에는 가뿐 숨이 뿜어져 나오고, 주저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 만나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지친 등을 기대는 쉼터가 되어준다.
새벽을 깨워 산을 오르는 이유는 이제부터 송이 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시에 시골에서는 우리가 처음으로 산에 입산금지 푯말을 붙이고 송이를 땄던 것 같다. 물론 그 엄청난 크기의 산이 우리 산은 아니었다. 산 주인에게 얼마를 주고 송이가 나는 시기에만 우리가 송이를 채취할 권리를 샀던 것이다.
송이가 나기 시작하기 전 우리는 빨간색 끈을 산 아래에 줄을 띄우고 곳곳에 <입산금지> 푯말을 써서 붙였다. 푯말에는 송이채취의 권리 및 불법 입산 시 조치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고,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그런데 이렇게 푯말과 줄을 띄웠다고 사람들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송이값이 비쌌기 때문에 철이 되면 너나 할거 없이 서로 송이를 채취하러 산을 오르던 시대기 때문이다.
줄을 띄웠으니 이제는 산에 기거할 임시거처를 만들어야 했다. 텐트를 치면 좋겠지만 한 곳에만 치면 몰라도 여러 곳에 거처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 숫자만큼 텐트를 살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산에는 멧돼지 같은 산짐승을 피해야 하기도 했고, 몰래 송이를 채취하는 사람들을 감시해야 할 넓은 시야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 위에 거처를 마련하기로 했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 가까운 거리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많은 곳으로 자리를 잡기로 했다. 굵은 참나무 네 그루를 직사각형 모양의 위치만 남기로 주변을 베어냈다. 베어낸 참나무는 나무 사이의 간격에 맞는 길이로 절단하여 2미터 정도의 높이에 있는 굵은 가지 위에 걸쳐 밧줄로 단단히 고정을 했다. 네 귀퉁이를 모두 결박을 하고 다른 나무들을 잘라서 그 위에 나무를 펼쳐 깔았다. 밀리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양쪽을 뗏목 묶듯이 묶어 고정을 시키고 그 위에 다시 잎이 무성한 가지를 그대로 올려 빈틈을 채웠다. 그 위에 흙을 얇게 깔고 다시 나뭇잎을 두껍게 올렸다. 푹신한 침대처럼 자리가 마련되었다.
다시 네 개의 긴 나무를 잘라와 나무 사이에 묶어 난간처럼 만들었다. 커다란 천막을 가져와 바닥 사이즈만큼의 위치에 각각 돌을 넣어 끈으로 묶은 후 4개의 기둥에 당겨 단단히 고정을 시켰다. 천막의 씌우고 나니 근사한 나무집이 되었다. 바닥에 불을 피울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최고의 감시초소와 숙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막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투명한 비늘을 잘라 본드로 붙여 사방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트리하우스가 완성된 것이다. 바로 옆에는 그 산에서 가장 큰 송이밭이 한눈에도 다 보이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산이 너무 컸기 때문에 곳곳에 이러한 거처를 만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다섯 곳 정도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매일 다섯 곳을 다 지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위치를 바꿔가며 감시를 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감시초소가 완성되고 송이를 채취할 시기가 되면 우리는 며칠씩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쌀이며, 라면, 반찬거리 등 음식까지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본격적으로 송이가 나기 시작했다. 첫날은 집에서 자고 4시에 일어나 산으로 향했다. 산에까지 가는데 한 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그 시간에 출발해도 5시는 돼야 도착할 수 있다. 송이밭에 도착하니 숨이 턱에 차오른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송이밭은 사물이 어렴풋이 보인다. 가져온 렌턴을 켜서 주위를 살피자 나뭇잎 아래서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송이가 한두 개씩 보인다. 송이는 위에서 아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봐야 잘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나뭇잎을 머리에 이고 올라오기 때문에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상품의 송이들을 선별해서 채취하고, 송이를 채취한 자리는 다시 흙과 나뭇잎을 덮어 꼭꼭 눌러줘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송이가 그 자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송이밭을 살피며 정상까지 오르면 8시가 훌쩍 넘는다. 정상에 오르면 피어오르는 안개로 인해 멋들어진 운해가 펼쳐진다. 높은 봉우리들은 섬이 되고 골짜기는 안개가 덮여 바다인 듯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넓게 펼쳐진 운해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불어오는 바람 따라 일렁이는 파도를 만드는 풍광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많은 등산과 여행을 다녀봤지만, 정말이지 나는 지금까지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때의 풍광은 정말 아름다운 장관이었던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그곳이 우리가 잠시 쉬며 허기를 달래는 장소가 된다. 산 정상에서 때우는 끼니가 별다른 게 있을 수 없다. 그저 배낭에 넣어온 라면과 두유 정도, 그도 아니면 빵이나 건빵이 아침을 대신한 요기거리였다. 그래도 아름다운 풍광을 반찬삼아 잠시 쉬며 달래는 허기는 꿀맛이다. 잠시 쉬기도 할 겸 배도 채우고 땀도 식었으니 다시 움직일 시간이 된다. 정상을 지나 반대쪽 산으로 내려오면서 송이밭을 확인하고 상품의 송이를 채취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점심때가 된다. 배낭은 이미 한가득이지만 송이무게는 그리 많이 나가지 않기에 조심하며 첫 번째 초소로 돌아온다.
송이채취가 끝날 때까지 똑같이 되풀이되는 날들이지만, 평일은 우리가 학교를 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정은 조금 다르게 움직였고, 일찍 산을 내려와 학교를 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꼼꼼히 송이밭을 다닐 수 없었고, 그 나머지 몫은 어머니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평일은 어머니가 거의 종일 산을 돌아다니셔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휴일이 되어야 우리가 송이채취를 도와드리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오후에는 어머니가 송이를 팔기 위해 읍내로 나가시고, 우리들만 산에 남아 송이밭을 지키며 시간을 때우고 놀이를 한다. 놀이랄 것이 별로 없는 데다 산이라 더욱 할 게 없다. 가끔 놀러 오는 다람쥐를 잡기 위해 긴 낚싯대를 가져다 놓고 끝에 낚싯줄로 올무를 만들어 다람쥐를 잡는다. 움직임도 빠른 데다 눈치도 빨라서 여간해선 잡기가 어렵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한 마리가 낚싯줄에 걸려들었다. 어쩌다 잡힌 다람쥐를 라면박스에 넣고 데리고 놀다 보면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틈 사이를 빠져 달아난다.
그렇게 오후가 지나고 어머니는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먹일 군것질 거리며 다음날 아침을 대신할 양식을 한 짐 지고 산을 올라오신다. 쉽지 않은 걸음을 힘든 내색도 없이 그렇게 거의 매일 오르내리셨다. 어머니가 오시면 우리는 손에 들리는 군것질 거리로 마음마저 풍성한 하루가 되었다.
송이밭을 지키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송이밭으로 들어온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가 미리 발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 번 더 발견되면 경찰에 신고한다는 경고를 했고, 다시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송이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해 송이는 흉년이었다. 송이가 생각보다 적게 생산돼서 우리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결국 한 달 가까이를 고생한 만큼의 보람도 없이 송이 철이 끝나버렸다.
우리야 멋 모르고 산속에서 캠핑하듯 재미 삼아 보냈던 시간이었지만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시간이었다. 산에 짐을 정리해서 내려오던 날 어머니 보고 "올해 송이가 적어서 어떻게 해요?" 하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어떻게 하긴, 어쩔 수 없지. 산이 하는 일을 우리가 거스를 수도 없고 주는 만큼 받으면 되는 것이지. 그래도 생각보다 꽤 벌었다. 너희들은 걱정 안 해도 돼." 하셨다. 어머니는 항상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고는 그 이상 안 되는 것에는 큰 미련을 두지 않으셨다. 물론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음을 이미 아시고 순종하시는 듯했다.
그런 어머니가 대단해 보였다. 뭐든 막힘이 없고, 우리 앞에서 망설임이 없으셨다. 그런 모습이 우리가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도 어머니는 우리가 뭔가 하겠다고 말씀드리면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 주신다. 그리고는 결과가 좋지 않다고 말씀드리면 늘 같은 반응이시다. "열심히 했으면 됐지. 어떻게 매번 잘 될 수 있니? 그래도 아쉬우면 다시 하면 되잖아." 하신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든든한 지원군이자 뒷배가 되어주시며, 무언의 가르침을 주시는 나에게는 다시 없을 진정한 어머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어머니가 곁에 계시기에 늘 힘이 난다.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