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운동회 기억들
하늘이 파랗게 바다로 변하는 계절이 되면 아이들 가슴은 이미 설렘으로 가득하다. 높아지는 하늘만큼 기다림도 커지는 가을 운동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운동회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하루를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을의 축제와 같았다. 운동회가 열리기 몇 주 전부터 아이들은 운동회 때 어른들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마스게임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3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마스게임 연습을 하기 위해 선생님이 학생들을 전부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선생님이 단상에서 동작을 가르치던 중 서로 손을 잡고 앞으로 왔다 뒤로 갔다 하는 동작과 팔짱을 끼고도는 동작을 보여주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른다.
"아~~!! 싫어요. 선생님"
"얘들아. 친구들인데 어때 손잡아 빨리."
"그런 거 안 하면 안 돼요?"
"안돼. 이렇게 안 하면 마스게임이 안되잖아. 빨리 손잡아."
아이들은 싫어하지만 마스게임이 정해져 있는 이상 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무조건 하라고 하신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고 동작을 하는 아이들도 있고, 직접 손을 잡기 싫은 아이들은 안 하지는 못하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같은 것을 주워서 손대신 나뭇가지를 맞잡고 동작을 한다. 아마도 선생님도 나뭇가지를 잡고 하는 동작이 다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모른 척 넘어가 주신다.
운동회 날이 다가오면 운동장은 분주해진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선들 긋는다. 잘 그려진 선은 뾰족한 괭이 같은 도구를 이용해 얕은 홈을 만들고 그 자리에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석회가루를 그 자리에 뿌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조치를 한다. 석회를 뿌리는 작업은 기계가 주로 했다. 기계에 석회를 넣고 앞으로 밀고 나가면 '덜덜덜'거리며 나가는 바퀴를 따라 석회가 떨어져 줄이 생겼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천막이 쳐지고, 학교 국기계약대에 국기봉에서 시작된 만국기가 운동장 곳곳으로 뻗어 나가 운동회가 준비되었음을 알린다. 교문 밖에는 이미 장사치들의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미리 온 사람들은 벌써 천막을 치고 테이블을 놓는다. 그렇게 가을 운동회는 준비를 모두 끝내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회 날,
운동장에는 이미 새벽부터 아이들의 운동회를 보기 위해 모여든 어른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나온 동생들의 손에는 이미 사탕이며 과자 같은 군것질 거리와 장난감이 한가득 들려있다. 어린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횡재에 마냥 기쁜 듯 얼굴엔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자리를 잡는다. 아이들의 체육복은 모두 하얀색 체육복으로 가슴에 청군은 파란 리본을, 백군은 하얀 리본을 달고 피아를 식별한다. 주로 응원단장은 담임선생님들 중 응원을 잘하는 선생님 두 분 정도가 각각 청군과 백군의 응원단장을 맡았다.
운동회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에 나와 줄을 선다.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끝나자, 국민체조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100미터 달리기다. 8명이 한 조가 되어 출발선에 서면 심판 선생님이 "준비", "차렷", "탕!!" 하고 화약총을 쏜다. 나는 맨 끝자리에 배정받아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가 총소리와 함께 앞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총소리가 너무 커 귀가 먹먹했지만 일등을 위해서는 귀 아픈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보다 키는 조금 작기는 해도 달리기를 잘한다. 매일 산 하나를 넘어 등하교를 하니 체력도 좋고 달리기도 잘하기 때문에 나의 경계대상 1호다. 질 수 없기에 숨마저 참고 온 힘을 다리에 집중해서 달렸다. 그래도 쉽게 따라 잡히지가 않았다. 중반 정도를 지나면서 마음이 조급해져 오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기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본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것이 보이자 신이 나서 더 빨리 달려본다. 결국 간발의 차이로 결승선을 내가 먼저 통과했다. 숨이 차서 쓰러질 것 같은데 누가 나 팔을 잡아당겨 내 팔목에 뭔가 꾹 눌러준다.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보니 영광의 ①이 찍혀 있다.
자리에 돌아오니 청군, 백군 응원단장들이 응원을 시작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청군~!!"
"네~~!!"
"선생님이 손동작, 발동작을 할 때마다 박수를 한 번씩 쳐라."
"네~!"
"자, 간다~"
선생은 재미있는 동작으로 박수를 유도하며 흥을 돋우었다.
"짝, 짝,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
"한 번 더~!!"
"짝, 짝,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
아이들은 신이 난다. 선생님의 동작도 재미있고, 응원하는 재미도 있다. 마스게임도 하고 어른들과 함께 달리기도 하고,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경기와 응원을 하며 즐기는 사이 점심때가 다가온다. 오재미로 박을 터트리면 점심시간이 시작된다. 청군과 백군이 나뉘어 각자의 박을 터트리기 위해 서둘러 오재미를 던진다. 박 주위로 오재미들은 날아다니고 서로 부딪히고 정신이 없다. 그래도 던지기에 자신 있는 나는 모서리 부분을 집중적으로 맞췄다. 열 번 정도 던졌을 때 박이 드디어 터졌다.
"와~~~~!!!"
"청군이 이겼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박에서는 '신나는 점심시간'이라는 글귀가 꽃가루와 함께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이어서 백군의 박도 터졌다. 선생님의 긴 휘슬로 청군의 승리를 외치고는 점심 맛있게 먹고 1시 30분에 모이라고 안내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김밥을 싸온 사람, 여러 가지 반찬과 튀김 같은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나는 어머니가 바리바리 싸오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용돈을 받아 친구들과 군것질 거리를 사러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맛있는 것이 너무 많아 뭘 사야 할지 몰라 고민을 한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고민이다. 결국 친구와 서로 다른 것을 사서 나눠먹기로 하고 각자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른다. 내 맘에 드는 장난감도 하나 고른다. 그렇게 친구와 몰려다니다 보니 점심시간은 이미 끝이나 버렸다.
오후에도 경기는 계속됐다. 나는 오전에 100미터와 장애물 경기를 했고, 오후에는 부모님 찾아 달리기와 계주를 했다. 내가 참가한 경기에서 라이벌인 친구를 모두 이겨버리고 팔목에 4개의 ①을 획득했다. 마지막 계주에서도 1등을 놓친 라이벌 친구는 그만 억울함에 울음을 터트렸다. 우는 모습이 안돼 보이긴 했지만 내가 이길 수 있는데 져주면 앞으로도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져 줄 수 없었다. 운동도, 공부도, 심지어 구슬치기와 딱지 치기까지 우리 둘은 라이벌이었으니까 더 지기가 싫었던 것이다.
마지막 경기인 계주를 끝으로 운동회가 끝나고 운동장에 모여 시상을 했다. 1등은 노트 3권, 2등은 2권, 3등은 1권이고, 종합 우승을 한 청군에는 3권의 노트가 추가로 지급된다. 담임선생님은 "어휴~, 너 혼자 전부 일등을 하면 어떻게 하니~"하시며 15권의 노트를 들어 내 머리에 살짝 "콩"하고 때리며 주신다. 참여한 전종목에서 1등만 한 사람은 나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장 많은 노트를 받아 들고 의기양양하게 어머니한테 가져다 드렸다. 어머니는 노트를 한 아름 들고 나타나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며 반긴다.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찾아오셔서 나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해주고 가셨다고 하시면서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운동회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고, 하늘에는 만국기가 여전히 팔럭이고 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파란 하늘을 향해 괜스레 도장 자국 4개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왼쪽 손을 들어 휘휘 저어 본다. 그런 모습을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만 보신다.
사진출저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