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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루하 Oct 30. 2024

내가 행복한 이유

22화

“오호, 연인한테 그런 걸 묻는 건 반칙이에요.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이 좋은데, 과연 객관적인 답이 될까요? 오늘 숙제라 생각하고 잘 생각해 봐요.”

“못 땠어. 정말.”


그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방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엔 그도 처음 들어오는 것이다. 나도 청소할 때 빼고는 잘 들어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방을 구경하다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온다.


“저 앨범 봐도 돼요?”

“돼요. 보세요. 잠깐만요. 어디 있더라. 여기 있어요. 엄마가 자주 인화해서 앨범으로 만들어 두기는 했어요. 보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네.”


여러 권의 앨범을 번쩍 들고 거실로 간 그를 보며 웃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손에 쥔 것처럼 신난 모습이다. 그를 보고 있자니 나다움이 뭔지 다시 궁금해진다. 작지만, 나만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노트북을 켜 ‘나’라는 글자를 썼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불행? 이제 불행하지 않다. 매우 행복하고 즐겁다. 나는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내 몫으로 떨어지면 그게 힘들든 힘들지 않든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려 한다. 


불만, 불평을 하지 않는다. 비록 서운할지라도 불만을 표시하기보다는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불평을 말하기보다는 내 선에서 처리하는 편이다.


그렇게 나에 대해서 적다 보니, 어느새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나는 생각보다 게으르고 생각 이상으로 긍정적이었다. 수용을 잘하고, 잘 삭히는 사람이었다. 나다움에 대해 좀 더 다가간 것일까?


“음, 윤미소라는 사람을 정말 분해했네요? 이 정도로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봐요. 저도 못하는 건데, 배워야 할 것 같은데요? 이제 당신다움을 설명할 수 있어요?”

“아뇨. 아직 모르겠어요. 저는 치마도 좋아하고 바지도 좋아해요. 저다움을 보여드리려고 일부러 꾸미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키고 싶은데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생각한 대로 해요. 당신 생각이 정답이니까.”


짧은 대화가 끝이 나고 손을 잡은 그가 앨범이 쌓여 있는 거실로 나를 데려왔다. 사진을 설명해 달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말 어릴 때는 기억나지 않아요. 어? 아빠 사진인가? 어디서 찾았어요?”

“이 사진 뒤에 있던데요?”


내가 갓 태어났을 때 찍은 사진 뒤에 숨겨져 있던 젊은 남자의 사진, 얼핏 갓난아기 인 나와 닮았다. 사진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여보. 우리 미소 잘 부탁해. 내가 하늘에서라도 지켜줄게.’

“아빠가 맞나 봐요. 고마워요. 명호 씨. 저 아빠 얼굴 처음 봐요.”

“잘 생기셨네요. 이리 와요. 왜 울고 그럴까?”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냥 반가웠다. 만약 엄마에 대한 상실감으로 힘들어했을 때 이 사진을 봤더라면 모든 원망을 아빠한테 쏟아냈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일까지 아빠 탓이라고 사진을 찢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엄마조차 아껴 두고 보던 귀한 사진일 건데 말이다.


“보물을 찾아서 너무 좋아서요. 당신 덕에 너무 행복해요.”


아빠의 사진을 한참 쳐다봤다.


“근데요? 엄마는 왜 이 사진을 보여 주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어머님은 아버님의 죽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신 것 아닐까요? 사진 뒤에 글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냥 멀리 있다 생각하고 사는 거죠. 평생.”

“그럴까요? 엄마는 굳이 숨길 필요까지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아버님을 너무 사랑하셨나 봐요. 차마 보낼 수 없었던 거죠.”

“마지막까지 그리워했던 사람이 아빠였군요. 늘 하늘을 보던 엄마의 눈빛이 아련했던 이유,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도 무덤덤했던 이유가 아빠였군요. 뭐 서운하지는 않아요. 마지막엔 그래도 끝까지 절 걱정해 주었으니까요. 엄마 마음은 제가 아니까 됐어요.”

“마음이 많이 넓어졌네요.”

“저 얘 아니거든요.”

“알아요.”


하지만 아이처럼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거두지 않는다. 나 역시 툴툴거렸지만, 실은 싫지 않다. 우린 밤새도록 앨범을 보고 웃었다. 그에게 나의 어린 시절에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좋기만 했다.


“저기 명호 씨?”

“네?”


앨범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돌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다음엔 당신 집에 갈까요? 저 당신 앨범 보고 싶어요.”

“우…, 우리 집이요?”

“네. 당신이 어떤 집에 사는지 궁금해요. 사실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해요.”

“당황스럽네요. 음, 일단 우리 집에 오면 한 가지 각오할 게 있는데, 괜찮아요?”

“뭔데요?”


갑자기 심각해진 얼굴로 내 눈만 쳐다봤다.


“저 남자예요.”

“알아요.”


뜬금없는 말에 웃었다. 누가 남자라는 거 모를까 봐 다시 말해 주는 걸까?


“그러니까 늑대라고요. 여긴 미소 씨 집이고, 어머님께서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참고 있는 건데, 우리 집에 가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 못해요.”

“명호 씨, 저 안 좋아하죠?”

“네?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요?”


억울하다는 것을 어필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가 축 내려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더 놀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안 좋아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요? 장소에 따라 바뀐다면 그건 처음부터 마음이 딴 데 있다는 것과 같은 거 아니에요?”


내 말을 듣고 그가 뭐라 변명할 거리라도 찾는지 입술을 달싹거린다. 그러나 섣불리 말은 못 하고, 크게 한숨만 쉴 뿐이었다.


“진짜 이젠 못 당해내겠네. 당신 말 맞아요. 농담이었는데, 이제 순진한 미소 씨는 못 보는 건가요?”

“저 어리지 않다니까.”


괜히 토라진 척 안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언제나처럼 문 앞에 선 그가 노크하며 그 특유의 조용하고 낮은 음성이 내 귓가를 간지럼 태우기를 기다렸다.


“미안해요. 다신 그런 장난 안 할게요. 문 열어줘요. 이러면 제가 마음 편하게 집에 못 가잖아요. 그냥 전 당신 난감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그게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우리 집 언제든지 와도 돼요. 저 아무 짓도 안 할게요. 아버지랑 이번 주 금요일에 보기로 했으니까 토요일에 올래요? 제가 데리러 올게요. 미소 씨? 미소 씨, 아직 화난 거 아니죠? 아니라고 해줘요. 네?”


다급한 목소리도 귀엽다. 저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가끔 보지만, 그때마다 귀여워 더 놀리고 싶어지는 사람이다. 더 그를 놀리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 그만 그를 보내줘야 할 시간이라 문을 열고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알았죠?”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화 풀린 거죠?”

“당신 하는 거 보고요. 이제 어서 가요.”

“조심할게요.”


늦은 시간 그는 자기가 보던 앨범을 제자리에 꽂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내 눈치를 보며 나가는 그를 보며 나는 살짝 놀라게 해주기로 했다.


“명호 씨.”

“네.”

“잠깐 고개 숙여봐요. 머리에 뭐가 묻었어요.”

“그래요? 어디요?”

“제가 해줄게요. 고개 숙여봐요.”


머리를 숙이는 그를 따라 조금 다가갔다. 나는 크게 호흡하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려 고개를 올렸다. 그런데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모를 줄 알았죠? 저도 20살 풋풋한 청년이 아니라서.”

“치. 진짜 당신 못 땐 거 알죠?”

“당신 앞에서는 좀 못 때도 괜찮아요. 저 이만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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