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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루하 Oct 30. 2024

첫 키스

23화

그가 돌아가고 며칠 후 금요일, 나는 청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아버님을 뵙기 위해 나갔다. 그의 아버지는 정장을 입고 내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주었다.


“온다고 고생 많았어요. 봄이 오기는 했어도 아직 추울 텐데, 이렇게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앉아요. 명호 너도 앉거라.”

“네, 아버지. 미소 씨. 앉아요.”


두 사람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몰라 당황했지만, 다행히 실수하지는 않았다. 


“오면 배고플까 봐 미리 주문했는데, 고기 좋아해요?”

“네. 말씀 낮추셔도 돼요. 아버님.”

“처음인데, 불편하지 않겠어요?”

“아뇨.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그래. 알았다. 그럼 나는 새 아가 말고, 미소라고 불러도 될까?”

“당연하죠. 아버님.”


그의 아버지는 그만큼 인자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아버님 또래가 된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아버님의 양복은 스프라이트 문양이 살짝 들어간 검은색 슈트였다. 광이 나는 검은 구두에 하얀 양말, 테이블 한쪽에 있는 중절모가 인상적이었다. 멋을 아는 분인 듯했다. 넥타이가 아닌 스카프를 쓰셨고, 갈색 뿔테 안경은 알이 없는 것이었다. 


“미소 양, 관찰한 소감은 어떤가?”

“네?”


그냥 곁눈질로 봤는데, 알고 있었다는 말에 놀라 딸꾹질이 나왔다.


“미소 씨 놀리지 마세요. 아버지.”

“치, 제 마누라 될 사람이라고 벌써 감싸는 거냐? 서운하다. 이놈아.”

두 사람이 대화하는 중에도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고, 얼굴은 점점 홍당무가 되어갔다. 그 바람에 아버님은 미안해하고, 그는 등을 쓰다듬으며 계속 물을 권했다. 한참 지나서야 겨우 멈춘 다음에는 고개를 들지 못해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이제 괜찮나? 미소 양?”

“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사과까지야. 잘못은 내가 했는데.”

“아버지.”


아버지를 조용히 부르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말을 멈춘 그를 보고 아버님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미소 양, 어서 먹게. 어,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님이 자기 접시와 나의 접시를 바꾸었다. 솔직히 이런 레스토랑은 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룸이라니. 가게 입구에 들어섰을 때 드레스 같은 우아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며 기가 죽어 있었다. 아버님은 그런 나를 위해 접시를 바꾸어 준 것이다.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는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나와 같이 청바지에 헐렁한 맨투맨 티를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어머, 아가씨가 윤미소?”

“네? 네.”


들어오자마자 내게 아는 체를 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하던 차에 아버님이 웃으며 말했다.


“요놈아! 너는 언제 철들래? 아버지가 있으면 나한테 먼저 인사를 해야지.”

“어, 아버지도 있었네. 지호 왔어요.”


그의 둘째 누나 지호였다. 그와 닮으면서 전혀 다른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지호는 남편을 소개하면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배고프다며 그의 음식을 집어 먹으며, 진짜 별일 아닌 것처럼 중대사를 말했다.


“아버지, 저 임신했어요. 벌써 4개월이라는 거 있죠? 딸인가 봐요. 배가 하나도 안 나와.”

“잉? 진짜냐? 우진아! 진짜냐?”

“네. 아버님. 진짜입니다. 방금 병원 가서 확인하고 왔습니다. 드디어 아빠 됩니다.”

“축하해. 집에는 전화했고?”

“네. 했습니다. 어머님께도 전화드렸고, 아버님 여기 계시다 처형이 그래서 일루 바로 왔습니다.”


입의 귀에 걸려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우진이라고 불리는 그의 얼굴이 그랬다.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반면 지호는 명호의 음식을 다 먹고, 메뉴판을 요청하고 있었다.


“누나, 내 것도 시켜. 나 배고픈데.”

“너도 임신했냐?”

“아니거든.”


캠핑 때와 비슷했다. 뽀짝뽀짝거리는 지금이 좋았다. 한쪽에서는 투덕거리고, 다른 쪽은 대화를 이어가는 분위기. 아버님과 우진은 나에게 연신 질문하기에 바빴고,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다. 혼자 살기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봤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말을 대신했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차를 마시는 시간에 지호가 말했다.


“미소 씨.”

“네?”

“저희는 다 미소 씨 편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엄마 마음만 열면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게 만만의 준비 저희가 해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내 편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흐른 눈물에 나조차 당황하고 말았다. 그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놀라 걱정스럽게 쳐다봤고, 그는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울지 말아요. 항상 당신 편인 저처럼 우리 식구 모두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 거예요. 엄마도 분명 당신 좋아하실 거예요. 지금 저렇게 고집 피우는 이유 당신이 아니라 저 때문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알았죠?”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즐겁고 행복한 만남이 있고 난 뒤의 집에 돌아오는 날 그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인지 ‘울보’라며 놀렸다. 웃으라고 한 농담이었지만, 소용은 없었다. 엄마 이후에 처음으로 생긴 사람, 명호로 인해 내 편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지윤이 그랬고, 솔빛이 그랬다. 그런데 이젠 그의 모든 식구가 내 편이라고 말하니 어떻게 감격을 안 할 수가 있을까? 


“혼자 잘 수 있어요?”

“혼자 잘 수 있어요. 저 괜찮으니까 어서 가요.”

“가기 싫다. 집 앞까지만 가요. 자, 올라가요. 안 타고 뭐 해요?”


진짜 서운한 지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먼저 타 부른다. 다시 헤어질 시간, 문 앞에 도착하자 이번엔 어서 들어가라 성화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이번엔 진짜 가라는 말에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며 토라진 척하는 그를 어르고 달랬다. 


겨우 헤어진 후, 집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쓸 게 너무 많았다. 노트북 앞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적어 내려가는데, 이전 글에 답글이 달렸다. 서로 이웃인 사람만 볼 수 있는 곳에 나의 일기장은 오직 명호만 댓글을 달 수 있었다.


[마음이 매우 아팠어요? 맞은 건 전데, 왜 우리 미소 씨가 아팠을까? 그만큼 저 사랑한다는 거죠? 사랑해요. 미소 씨. 이제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당신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그의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당신 때문이에요. 고마워요. 저도…. 사랑해요]

답글을 단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


그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건 말이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끊어진 전화. 10분 후에 초인종이 울렸다. 역시 그였다. 거친 숨을 쉬며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혹시 걸어왔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올 만큼 여유가 없어서요.”

“왜요?”

“뭐라고 했어요?”

“뭐 가요?”


일단 시치미를 뗐다.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그에게 등을 보이며 들어오라 말했다. 물이라도 먹여 보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만, 그가 다시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말로 해줘요. 부탁이에요.”


벌써 1년인가? 그를 만난 게? 사랑을 시작한 지는 언제부터였는지 나도 모르니 그를 만난 걸로 치자면 1년이 넘은 건가? 겨울에 만났으니 그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왔다. 그동안 그는 한결같이 나를 사랑했고, 변함없었다. 나는 어땠을까? 내 마음은 솔직히 나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것, 그뿐이다.


“사랑…, 해요.”

“다시요.”


눈을 꼭 감았다. 부끄럽고, 쑥스럽고 그런 복잡한 감정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했다.


“다시요. 미소 씨.”

“사랑해요. 사랑한….”


입술에 닿은 또 다른 입술. 첫 키스였다. 현실감 따위 들지 않았다. 꿈인 것처럼 붕 뜬 기분이었다. 그러나 점점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 소리와 두 뺨을 감싸는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이럴 때 쓰나 보다. 


아쉽게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그가 말했다.


“사랑해요. 미소 씨. 잘 자요.”


무거운 짐이라도 들고 있다는 듯이 돌아서는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처럼 나 역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움직인 건 한참 후였다.

구두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입가에 남아 있는 열기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 늦게까지 잠을 설치고, 겨우 씻은 후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나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첫 키스 2023년 03월 20일 밤 11시 14분]


그가 전화를 끊고, 10분 뒤에 올라와서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이고, 평생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비공개로 할까 말까, 고민하다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그와 나 사이에 이건 비밀이 되지 못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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