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요. 한참 등교를 하지 않으니, 이러다 3학년 진학이 어려울 수 있다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부모님의 성화로 학교를 갔어요. 그런데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물에 갠 밀가루 물을 뒤집어쓴 거예요. 반 아이들은 깔깔대고 웃고, 저는 그들을 노려보았죠.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어요. 그렇게 저의 왕따 인생은 공식적으로 부모님 귀에 들어갔어요. 어머니는 학교폭력위원회를 열 거라고 성화였고, 저는 그 모든 게 귀찮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지 그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며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려 했다.
“저는 결국 폭발했어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집에 들어와 모든 식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소리쳤어요.”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은 나도 알았다. 그랬기에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내 눈을 보며 입을 달싹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지 입술이 말라 갔다. 여기서 물을 건네면 그의 결심이 사그라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뭐라고 말했냐면요. 절 다시 버려달라고 했어요. 한번 버렸으니까 두 번은 쉽지 않냐고…. 말하면서 집에 물건을….”
결국 울어버렸다. 두 손으로 부끄러운 제 얼굴을 가리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흐느끼는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과거로 돌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막을 수 있었을까?
떨리는 어깨가 진정이 되고,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그는 세수를 하고 온 듯 머리에 물기가 있었다.
“그날 집이 난장판이 되도록 아무도 저를 말리지 못했어요. 저는 손에 상처가 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겨우 멈췄고, 그런 나를 큰누나가 치료해 주었죠. 어머니는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어요. 작은 누나는 말할 것도 없이 울고 있었죠.”
한꺼번에 이어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잠시 말을 끊은 그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달 후에 어머니가 화병이 오셨어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입원을 하시고,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 온 거예요. 저는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뛰어왔지만, 어머니는 이미 마취약에 취해 잠들어 있었어요. 저는 용서를 빌었어요. 잘못했다고, 진심이 아니라고 제발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오기만 하면 예전에 착한 아들로 돌아가겠다고 말이에요.”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떨어졌다. 손으로 쓱 닦은 그는 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런데 수술은 성공했지만,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어요. 아마도 저 때문이겠죠. 저로 인한 화병과 마음의 짐이 겹쳐서 마음에 병이 온 거겠죠.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108배를 하면서 어머니의 안녕을 빌었어요. 부처님께서 탄복하신 건지 아니면 어머니의 병이 치료가 된 건지 1년 하고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어머니께서 일어나 제 방에 오셨어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기다시피 오셔서는 말씀하셨죠. ‘미안하다.’라고.”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때가 생각났는지 촉촉해진 눈을 말리려 애썼다.
“저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때 바로 저도 잘못했다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어리석게도 저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심지어 어머니의 사과를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 바보 같이 잠든 척했어요. 그냥 일어나 한마디만 했더라면 미소 씨 이렇게 마음고생 하지 않게 해도 되었고, 어머니도 저도 짐 따위 없었을 텐데, 어린 저는 그러지 못했죠. 어렸던 건지 어리석었던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저는 또다시 어머니에게 죄를 짓고 말았어요.”
그는 내게 무슨 말이든 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어요?”
고르고 고른 말이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길 바랐다.
“네. 그러고 싶어요. 이제라도 서로 마음의 짐 따위 덜어내고 편해지고 싶어요. 그때 어머니 당신의 사과를 들었고, 그때 제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를 꼭 안아주며 생각했다. 그에게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나에게 도와달라 말하는 이 사람에게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용기가 생길 때 말해요. 제가 뒤에서 지켜봐 줄게요. 당신 옆에 없더라도 기억해요. 당신 뒤엔 제가 있다는 걸. 그러면 좀 힘이 될까요?”
“당연히요. 당신이 지켜봐 준다면 저 할 수 있어요.”
그가 용기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용기를 내는 것은 본인 말고는 할 수 없다. 스스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고, 그래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고마워요. 다음부터는 제가 어머니한테 말하고 난 뒤에 보여 줄게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가요. 오늘은 좀 걷고 싶은데, 어때요?”
“좋아요. 당신과 하는 건 뭐든 좋아요. 가요.”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가둔 덫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그와 내 집에 중간 지점쯤 되었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미소 씨. 저 만난 거 후회한 적 있어요?”
분명 불안한 질문이었지만,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지금 그의 마음이 복잡한 걸 알기 때문이리라.
“있었어요. 당신 구두 소리가 기다려질 때요. 그때가 언제인지는 저도 잘 몰라요. ‘아, 이 사람이 내 맘속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그날, 공원에 간 걸 후회했어요. 평소처럼 그냥 집에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린 아무 사이 아닌 상태로 있었을 것인데, 하고 후회했어요. 그리고 당신과 재회하고 다시 고백받았을 때 정말 후회했어요. 당신처럼 사랑받고 자란 사람에게 왜 나 같은 사람이 눈에 띄었을까? 내가 아니었으면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과 알콩달콩 잘 살았을 텐데, 왜 내가 눈에 들어서 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 뭐 그렇게 말이죠.”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그에게 비밀을 만들기보다는 솔직함이 더 절실히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후회 안 해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야 그가 믿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후회 안 해요. 지금은 명호 씨 만난 것에 감사해요. 명호 씨 사랑하게 되어서 행복하고, 당신의 아픔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기뻐요. 명호 씨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누구보다 진실한 사랑과 굳은 믿음을 줄 수 있으니까 그걸로 만족해요.”
우린 서로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시선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면서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고마워요. 위로해 주고, 용기를 줘서 고마워요. 미소 씨.”
“당연한 거예요.”
“미소 씨에게 당연한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집에 데려 다 준 뒤 그는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온 것은 1시간쯤 후였다. 그리고 블로그에 댓글이 달렸다.
[당신의 처음이 될게요. 그리고 마지막이 될게요]
나의 답글은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저도 그럴게요]
그는 한동안 내 집에 오는 것을 멈췄다. 말은 바쁘다고 했지만,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무라지 못했다. 그가 없는 쓸쓸한 저녁은 일로 채우고, 일이 없으면 글을 썼다. 책도 보기도 하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 나갔다.
저녁 늦은 시간, 드디어 구두 소리가 났다.
“왔어요?”
“네. 기다렸어요?”
“그럼요. 들어올래요?”
평소였다면 ‘들어오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에 표정이 비장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뇨. 잠깐 얼굴 보려고 온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서요.”
“저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잘하고 와요.”
서로 두서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럴게요. 모레 올게요. 잘 자요.”
“네. 당신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가 다녀간 다음 날, 낯선 번호가 휴대폰에 찍혔다. 예감이라고 할까? 받아도 될 것 같은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윤미소 양 전화인가요?”
“네. 제가 윤미소입니다. 누구세요?”
“저는 오명호 어미입니다. 잠시 통화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