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처음 봤을 때 그 무서운 말투가 아닌 우아하고 정중한 말투에 긴장이 되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명호 왔나요?”
“아니요. 오지 않았어요.”
의외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마 올 거예요. 만약 오면 잘 토닥여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네. 그럴게요.”
내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이번에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는 것 같으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오늘 명호가 매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니 혹시 오면 그냥 토닥토닥해 주세요. 혹시 얘기를 하면 들어주고 그러시면 될 거예요.”
“네.”
그녀는 잠깐의 정적으로 시간차를 두고 다음 말을 했다.
“그리고 전에는 미안했습니다. 사실 미소 씨한테는 아무 감정 없어요. 딱히 미소 씨가 잘못한 것도 없고, 부모님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 그걸 탓할 이유도 없죠. 단지 저는 명호가 어릴 적 아픔이 있는 아이이니 자기가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 아닌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길 바랐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제 생각이 틀렸군요. 미소 씨는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하러 와요. 맛있는 것 만들어 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울지 말아요.”
우는 줄도 몰랐는데, 그걸 캐치하고 달래주었다.
“어머니라고 불러도 돼요. 엄마라고 불러도 되고 어느 쪽이든 미소 씨 편한 대로 불러요. 그리고 무례하게 대한 저를 용서해요. 어른이라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거든요. 상처도 받고 이겨내지 못하면 병도 생기고 그래요. 병이 나면 신경이 날카로운 법이죠. 잘못된 길을 가는 것도 모르고 계속 가는 어리석음도 있어요. 어른도 잘못을 한답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속죄하면서 더 잘해 줄게요.”
“용서는 예전에 했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님, 아버님께서도 매우 힘드셨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마음고생 많으셨어요.”
휴대폰 너머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명호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참 다행이네요. 미리 알아보지 못한 제 어리석음이 원망스럽군요. 그럼, 이만 끊어야겠어요. 명호 잘 부탁해요.”
울먹이던 어머님은 대답도 듣지 않고 끊으셨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울었다. 다행히 대화가 잘 되었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을 그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간, 그가 왔다. 그러나 구두 소리가 멈추어도 초인종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면 바로 열려고 했지만,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많이 지친 그가 서 있었다.
“잘하고 왔어요?”
“네. 덕분에 봉인할 필요도 없이 잘 끝냈어요.”
“들어올래요?”
“들어가도 돼요?”
“네. 들어오세요.”
처음 그가 우리 집을 방문하던 날이 떠올랐다. 나의 끼니를 걱정하며 조심스럽던 그를 다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미소 씨. 이리 와봐요. 이리 와서 저 좀 안아줘요.”
내게 안긴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내가 알아야 한다면 그가 말했을 테니 말이다.
한참 안겨 울던 그는 얼굴을 들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그날 당신의 사과를 들었다고 말이죠. 어머니께서는 우셨죠. 하지만 나무라지는 않으셨어요. 그저 듣기만 하셨죠. 정말 운을 떼기가 힘들었어요.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할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했어요. 그때 당신이 떠올랐죠. 당신이 저를 보던 단호한 눈빛이 떠올라 저는 용기를 내려 노력했어요.”
이미 지난 일인 것만 말하는 게 어려운지, 큰 한숨이 들려왔다. 다음 이야기를 하기 전 몸을 때고, 내가 놓아둔 물을 단숨에 마셨다.
“어머니와 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제가 망설인다는 것을 아신 어머니께서는 눈물을 닦으시고, 조용히 기다리셨어요. 역시 어머니라는 존재는 다르더군요. 아마 몇 시간이 흘렀을 거예요. 적어도 저에겐 그렇게 느껴졌어요. 겨우 무릎을 꿇고 말했어요. 저를 버려달라고 말해서 죄송하다고 말했어요. 진심이 아니었다고 했죠. 정말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어요.”
나는 그녀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아들을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생각했다. 그를 위해 그에게 시간을 주는 동안 애가 탔을 것이다. 겉으로 티도 내지 못하고, 아마 아들을 지켜보기만 했을 어머니의 심정. 아팠을 것이다. 어서 일으켜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 그 모든 걸 온전히 혼자 감당했을 어머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머니는 묵묵히 제가 용서를 빌 때까지 지켜봐 주셨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만약 제가 말하기도 전에 괜찮다 하셨다면 저는 다시 말할 용기를 갖지 못했을 거예요.”
잠시 뜸을 들이며 그때를 회상하는 눈빛이 진지했다. 나에게 오늘 일을 ‘꼭 보고하겠다.’이기보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는 얼굴을 땅에 대고 다시 한번 말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요. 그제야 어머니는 제게 와서 말씀하셨어요. ‘그래, 용서하마.’라고요. 저는 울었어요. 어머니께서도 우셨죠. 용서를 비는 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쉬운 것이었는데, 참으로 어려웠어요.”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동요 없이 들으려 나 역시 노력했다.
“어머니 집을 나와 무작정 걸었어요.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홀가분해지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그런 복합적인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오랫동안 쌓아둔 짐을 드디어 벗는 것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랬어요. 걷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걷다 보니 당신 집 앞이었어요.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데, 누를 수가 없었어요. 복잡한 머리가 자꾸 저를 붙잡아서 당신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저는 더 오래 방황했을지도 몰라요.”
“잘 왔어요. 여기서 쉬어요.”
“네. 그럴게요. 제게 퀘렌시아가 되어주어서 고마워요.”
“퀘렌시아가 뭐예요?”
“쉽게 말하면 저만의 쉼터!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래요. 당신의 퀘렌시아가 되어 줄게요.”
“고마워요.”
그는 내 방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처음엔 잠들지 못하는 그를 위해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듣기 좋다며 중얼거리다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졌다. 일부러 방을 어둡게 해 두고 문을 닫았다.
그는 오랫동안 잠에서 깨지 못했다. 일요일 저녁까지 일어나지 않자 미소는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노크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자는구나!’ 싶어 문을 열어보니 이미 일어나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냥요.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리를 했어요. 저는 무슨 일을 하든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지 안 그럼, 나중에 뒤죽박죽이 되어서 머리가 아프거든요. 이번엔 당신 덕에 빨리 회복했어요. 고마워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우리 저녁 먹을까요?”
“네. 금방 나갈게요.”
“저는 상 차리고 있을게요.”
그가 나올 동안 따뜻하게 국을 데우고, 예쁘게 담았다. 국과 반찬이 있는 곳에 마지막으로 밥을 놓아두고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나온 그는 말끔한 차림이었다. 어제의 그 어두운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맛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프네요.”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그는 열심히 밥을 먹었다. 어쩌면 진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더 줄까요?”
“네. 고마워요.”
생각보다 길어진 식사 시간이 끝이 나고 차를 마시러 거실로 갔다. 그때 그의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미소 씨!”
“네.”
“어머니께서 밥 먹으러 오래요. 다음 주에 점심때쯤 와서 저녁까지 먹고 가라는데, 뭐라고 답할까요?”
“어머님께서 부르시는데, 가야죠.”
그는 나를 보며 웃었다. 궁금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말하지 않았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전화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떨 땐 암묵적인 침묵 속에 진심이 전달될 때도 있는 법이었다. 특히 서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며칠 후 그의 본가에서 우리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처음으로 첫째 누나의 남편도 보았고, 아들 솔빛 말고, 딸 솔희도 만났다. 지호의 배 속에 아이는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으며, 헤어질 무렵에는 서로 아쉬워 하룻밤 자고 가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다들 스케줄이 바쁜 사람이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벚꽃이 피는 4월 초.
명호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회사 앞에 공원은 벚꽃과 목련이 아름답게 피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자, 꽃잎들이 아름답게 날렸다. 그때 명호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식상한 거 알아요. 하지만 식상한 방법이 제일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거 알아요?”
“….”
“역시, 눈치가 빨라. 미소 씨. 나와 결혼해 줄래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벚꽃이 그들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