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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터러시 멘토 Aug 15. 2022

듣는다는 것=사랑한다는 것

조금은 한가한 낮 시간, 저에게 특별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브라질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4학년 여학생이 한국에 1달 반 정도 머물 동안 논술학원에 다니고 싶어 했고, 잠깐 머물게 된 동네에서 적당한 곳을 찾다가 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초등 아이들과는 열심히 영어책만 읽고 있어서 “4학년 논술반 지금은 없어서 아쉽네요.” 하는데, 사실은 보통의 한국 아이들과 조금 다르기도 하고, 영어책 읽기에도 관심이 있고, 이차저차 해서 일대일 수업이면 더 좋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둘만의 특별 한글책 영어책 읽기 쓰기 프로젝트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껌딱지인 둘째가 2달 동안 캐나다에 있는 사촌들 집에 놀러 가는 바람에 조금은 적적했는데, 눈이 똘망똘망하고, 입은 근질근질한 막내딸 같은 귀여운 아이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아 신기했습니다.


논술학원에 오고 싶었다는 조금은 남다른 아이. 제가 가르쳤던 몇몇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는 신중한 자세로 책장에 꽂혀 있는 한글책, 영어책들을 둘러보며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저는 저대로 또래 친구들이 좋아한 책들, 이야기책, 지식책 다양하게 골라 책상 위에 펼쳐 놓아 봅니다. 고등학생인 언니들은 열심히 학원 다니고, 본인은 한국에서 생각보다 별다르게 할 일이 없다며 책을 잔뜩 챙겨가는 수현이. 수현이는 어떤 아이, 어떤 사람일까?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장점이 있으며, 또 어떤 부분이 힘들고, 부족할까 하는 생각이 수현이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스쳐갔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 지난 시간에 챙겨간 한글책, 영어책들을 책상 위에 펼치며 한 권, 한 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함께 나눠서 읽기도 하고, 모르는 부분은 질문도 하고, 그러다 책 내용과 관련된 수다가 길어집니다. 국제학교에서 영어 쓰고, 포르투갈어 배우지만, 한글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친구라 앞으로 한글로 시도 써보고, 독후감도 써보자 약속합니다. 첫 수업 후에 엄마의 팔에 매달려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의 눈빛이 반짝이는 모습이 감동이라는 귀한 수업 후기를 듣고 저는 또 한 번 신기합니다.  


“논술 학원에서 뭐하고 싶었어?”

 

“이런 거요.”

 

“이런 거?”

 

“같이 이야기 나누는 거요.”


아마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고,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현재의 삶도 많이 다르지만 4학년 수현이와 저는 금새 친구가 되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책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수현이와는 말을 길게 하지 않더라도 들을 귀만 준비하면 아이와 눈 맞춤이 책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권, 주로 자신이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서 읽다 보니 할 이야기가 더 많아졌습니다. 한글책, 영어책, 이야기책, 지식책 조금씩 접근법을 다르게 해서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은 조금씩 건드리고, 수현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다 보니, 논술반에서 친구들이 하는 역할을 제가 맡게 된 셈입니다.  



수현이와의 수업을 통해 다시 한번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최근에 다시 읽고 있는 책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는 ‘누군가의 말에 집중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정의가 나옵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행동이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저자가 ‘듣는 것’을 행동의 중요한 내용으로 밝히는 부분에서 생각할 점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나는 얼마나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나 반성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잘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에 고개를 수십 번 끄덕였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수많은 말들에 귀를 기울이기가 힘듭니다. 부모 노릇은 아주 복잡한 과제임으로, 또 아이들의 말은 대부분 반복되거나 집중하기에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아이들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기가 정말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며 존중이므로 아이가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존중감을 가진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부모는 자신의 듣는 자세를 잘 갖추고 듣는 지혜를 총동원해야 합니다. 책에는 맞장구치기, 또 선택적으로 듣는 지혜 등이 흥미롭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듣는 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큰 아이는 큰 아이대로 마음을 우선 먼저 알아주고, 할 말이 있으면 귀를 열고 들어줄 때 그래서 그 아이의 지금 현재, 그 아이만의 특별한 점을 받아들여줄 때 비로소 배움의 관계가 잘 놓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존중이 존중을 낳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책에 나온 부모와 아이가 함께 앞을 향하여 더 빠르고 빠르게 사랑의 2 인무를 추며 회전한다는 묘사가 이 선순환을 겪는 부모와 아이,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잘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편견, 판단 기준, 욕구들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거나 제쳐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점이 듣는 사람에게 요구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듣는 사람도 이 에너지 많이 드는 노력을 통해 자신을 확장하는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부모나 선생은 이 점에서 매우 취약합니다. 아이나 학생들에게 받기보다는 주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자신이 줄 것에 집중하게 될수록 아이에게서 오는 것은 빨리 막고, 자신의 것을 던져주기 급급합니다. 이 점에서 아이나 학생은 부모나 선생보다는 친구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내가 친구들보다 더 줄 것이 많은 부모와 선생일수록 역설적으로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기다려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한 달반이 금세 지나 수현이는 브라질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계속 친구로, 학생과 선생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눈을 맞추고, 바로 옆에서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들어주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이 있으니 우리의 친구관계는 조만간 더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수현이는 책의 저자들에게서 배우고, 더 많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익히고, 저는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생각하며 가르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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