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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Jun 17. 2022

고민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20

 


필립 존슨 _글라스하우스

포스트 모던 건축가인 필립존슨은 서른이 넘어서 느지막히 건축공부를 시작했고, 미스 반 데 로에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미스의 판스워스 하우스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땅에 자신의 집을 짓는데, 그것이 이 글라스 하우스이다. 가운데 원통형 메스에 화장실을 놓고 그 외의 벽은 전부 유리로 처리해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살기엔 힘들었을지 몰라도 앤디워홀을 비롯한 예술계 저명인사들이 자주 방문해서 교류했다고 알려져 있다. 






며칠은 고민하던 민영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 순수하게 일로만 도와주는 거면 준수 오빠가 와도 괜찮아. 하지만 처음엔 일적으로만 같이한다 치더라도 예전 감정 때문에 그렇게 지속되긴 쉽지 않겠지.. 하지만 그 오빠도 정신만 차리면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잘 타이르고 설득하고 하면 다시 사귀어도 괜찮지 않을까. 00공사에서 데인 것도 있으니 그 쪽으로 돌아갈 리도 없고. 일단 몇 달이라도 같이 일해 보면서 판단하자. 일단 지혜랑 상의해볼까..’


민영은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혜야, 나 민영이. 잘 지내지?”


“그래, 민영아. 나야 뭐 항상 똑같지. 김준수 그 인간은 연락 계속 와?”


“응..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다녀갔어. 월급 안 받더라도 일단 일적으로만 몇 달간 도와주고 싶대.”


“그렇게까지 말했구나.. 남녀 사이가 아니라 업무적으로만 같이 하고 싶다, 뭐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 거지?”


“응. 그래서 일단 몇 달이라도 같이 일해 보면 어떨까 싶어. 사실 그 오빠도 정신만 차리면 정말 괜찮은 사람이니까. 정말 아니다 싶으면 내가 그만 하라고 하면 되고..”


“민영아, 솔직히 난 반대야. 물론 니가 혼자 일하느라 외롭고 힘들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김준수 그 인간은 니 착한 성격 이용해서 조금씩 치고 들어오려는 거로밖에 안보여. 그렇게 몇 달 일해주다가 슬금 슬금 남녀사이로 발전하려고 할 거 아냐.”


“난 그래도 좋다고 생각해. 내가 잘 타이르고 달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00공사에서도 데였으니까 다시 돌아갈 리도 없고. 원래 설계만 하던 사람인데 따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지켜보다가 정말 아니면 그 때 그만하자고 하면 되고.”


“에휴.. 니가 그 사람 정말 좋아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진짜 미워도 다시 한번이네. 민영아, 난 너 충분히 말렸다. 나중에 나보고 왜 안 말렸냐고 하지마. 암튼 내가 볼 땐 그 사람 정말 아니야. 아무리 일 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렇게 배신한 사람은 금방 다시 배신할 수 있어. 판단은 니가 하는 거지만, 아무튼 내 말도 생각해줘.”


“알았어, 지혜야. 고마워.”


전화를 끊고 지혜는 한숨을 내쉰다.


‘나중에 아니다 싶으면 그만하자고 하고 정리한다고? 설민영 성격에 그럴 수 있을까? 더구나 김준수 같은 능구렁이를 상대로? 글쎄.. 아무리 봐도 김준수 수작에 말려들어가는 거 같은데.. 민영이 얘는 마음 속으론 김준수 그 자식 받아줄 생각 굳힌 거 같네. 어쩌려고 저러는지 원..’


며칠이 지나고 고민하던 민영은 준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어, 민영아. 웬일이야, 니가 먼저 연락을 다하고.”


“응, 오빠. 말한 것 생각해봤는데.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고 있어.”


“그래? 정말 고맙다 민영아. 네 믿음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한 건 아니고.. 오빠랑 만나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오빠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 건지도 들어보고 싶고..”


아무튼 민영이 얘는 우유부단한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뭘 만나서 또 이야기를 해. 그냥 결정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준수는 직감적으로 민영이 90% 이상 넘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니가 나를 믿을 수 있게 하려면 뭐든지 해야지. 그럼 내가 너 사무실 있는 쪽으로 갈까?”


“아니, 오빠가 이리로 여러 번 왔었으니까. 이번엔 내가 갈게. 오빠 지금 지내는 곳이 어디라고 했지?”


“응..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합정역 근천데..”


준수는 살고 있는 원룸의 주소를 민영에게 알려주고 근처 카페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는다. 


‘됐어. 민영이 얘는 거의 넘어왔어. 이제 수영이(대표이사 딸) 쪽이 문젠데..’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하려는데 갑자기 전화기가 울린다. 이런, 00공사 대표의 딸, 수영이다. 최근까지도 계속 대표를 설득하고 있는데, 대표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느껴져서 준수는 이 쪽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어 그래, 수영아. 웬일이야?”

“... 오빠. 어제도 아빠랑 이야기 해봤는데..”

“응, 그래 수영아. 뭐라셔?”

“그럼 오빠가 모아놓은 돈은 얼마나 되느냐.. 집안이 아무리 가난해도 오빠가 스스로 돈 열심히 모았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 같은 것이 명확하다고 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하시네..”

“아, 그래? 잘됐다, 수영아. 그래도 반응이 많이 괜찮아 지셨네.”

준수의 목소리에 화색이 돈다.


“그래서 말인데, 오빠 돈 얼마나 모았어? 모아놓은 돈 좀 있어?”

준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돈을 버는 대로 족족 쓰며 즐기는 삶을 살아온 준수는 말 그대로 모아놓은 돈이 전혀 없다. 00공사에 들어온 뒤로 월급이 많이 올랐는데, 그에 맞춘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느라 펑펑 다 써버렸다. 지금 들어와 있는 원룸 보증금도 정말 간신히 마련한 것이다. 


“그게.. 약간은 모아 놨는데, 그렇게 많이는..”

“뭐야, 오빠. 확실히 대답해. 우리 미래가 달린 문제야. 얼버무리려고 하지 마.”

“음.. 조금은 모아 놨어. 한 일억 정도..”

당황한 준수는 엉겁결에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래? 아주 적지는 않네. 오빠, 내가 볼 때 우리가 아빠랑 만나서 담판을 한번 지어야 할 거 같아. 지금 내가 오빠 있는 데로 갈 테니까.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 좀 해.”

“지금?”

“응. 나 지금 급해. 아빠 마음이 언제 돌아설지 몰라. 빨리 이야기해서 결론 지어야지. 오빠 지금 바빠? 요새 회사도 안 나가잖아.”

“아니, 지금 집이야. 그럼 얼른 와. 같이 이야기하자.”

준수는 민영과의 약속이 생각났지만, 민영보다는 수영과의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다. 여기서 대표를 설득해서 수영과 결혼만 하게 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민영에게는 전화해서 갑자기 급한 약속이 생겼다고 하면 되겠지. 다른 날 만나자고 하자.


“민영아, 나 준순데. 갑자기 상가집에 갈 일이 생겨서. 아직 출발 안했지? 그렇게 급하지 않으면 다른 날 보면 안 될까?”

“그래? 나 벌써 출발했는데..  언제 돌아와?”

“글쎄.. 아주 친한 사람은 아니라서 한 네 시쯤?”


“할 수 없지. 근처 카페 같은데 가서 기다라고 있을게. 노트북 들고 나왔으니까 거기서 일하면 돼. 괜찮아.”

“아.. 벌써 출발했구나.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줘.”


제기랄, 벌써 출발 했구나. 약속을 미루려고 했는데.. 내가 매달리면서 부탁하는 입장에서 마냥 약속을 바꾸자고 할 수만도 없다. 할 수 없이 일단 수영을 오라고 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핑계를 대고 나가서 민영을 만나는 수 밖에 없다. 양쪽에 거짓말을 하면서 두 여자를 만나야 하는 준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준수를 만나러 가는 민영의 머리 속도 복잡했다.


‘과연 이 오빠를 사무실로 불러들이는 게 잘하는 선택일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겠지. 무슨 선택을 해도 책임은 내가 져야 해..’


준수는 급한 대로 원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그렇게 지저분할 건 없지만, 애인이 온다는데 조금은 치워야 했다. 


‘엉겁결에 거짓말을 하긴 했는데, 수영이가 오면 뭐라고 하지.. 수영이 성격에 당장 통장 까보라고 할텐데.. 에라, 모르겠다. 없는 돈을 만들 수도 없고. 앞으로 잘 모은다고 하지 뭐. 아무튼 수영이 얘는 나 없으면 못 사는 애니까..’


고민하고 있는 순간에 전화벨이 울렷다.

“오빠, 나 거의 다 왔어. 주차장에 내려와 줘.”

“아, 그래. 금방 왔네. 지금 내려갈게.”


수영의 집이 그다지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수영아, 어서 와. 미리 말할 게 있는데, 방금 상가집에서 연락이 와서.. 아는 분이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 4시쯤에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한 두시간 걸릴 것 같은데, 금방 갔다 올게.”

“그래? 할 수 없지 뭐. 그 동안 드라마라도 보고 있을게. 아무튼 앉아봐."


성격 급한 수영이 테이블에 앉자 마자 본론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오빠, 일억은 모아놨다고 했지? 잘됐다. 그거랑 부모님이 도와주시는 거 하면 전셋집 정도는 할 수 있을테니까.”

“그래.. 그렇겠지.”

내심 대표가 집 하나 정도는 해줄 줄 알았던 준수는 수영의 말에 약간 실망했다.


“그래서 그런데, 오빠 모아놓은 돈 좀 보여줘. 정확히 얼만지 좀 보게.”

“뭘 그런 걸 다 보려고 해.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내 통장까지 관리하려고?”

“결혼할 사이니까 봐야지. 그리고 우리 아빠 설득하려면 어차피 다 보여드려야 해. 우리 아빠 성격 알잖아.”

“그렇긴 하지만..”

“오빠, 그러지 말고 얼른 보여줘.”


머뭇거리던 준수는 말 끝을 흐리고 만다.

“수영아, 사실 나 그 정도 모아놓은 돈 없어.. 아까 니가 너무 세게 물어봐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거야..”

“뭐라구? 그걸 말이라고 해? 오빠 나한테 거짓말 한거야?”

“미안해, 수영아.. 나도 너랑 진짜 결혼하고 싶어. 그런 마음에 한 말이야..”


수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 오빠. 저번에 파혼된 것도 오빠가 나한테 집안 얘기를 나한테 제대로 안 해줘서 그런 거잖아. 내가 웬만큼 사는 집처럼 말했다가 아빠가 당황하고 실망했던 거잖아! 또 그러면 어떡해?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거 안보여?”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잖아.”

“아무튼 오빠 말은 이제 하나도 못 믿겠어. 그러니까 더 통장 보여 달라고 하는 거고. 그럼 오빠 돈 얼마 있어? 일억은 아니라도 몇 천은 있을 거 아냐?”

“그게..”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근처 까페에 자리를 잡은 민영은 노트북을 켜고 잡스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혼자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가 사무실에 매여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민영은 가끔 일이 잘 안되고 기분전환이 필요하면 이런 식으로 노트북을 들고 나와 카페에서 일하곤 했다.


‘이 동네도 괜찮네.. 한적하고. 이제 슬슬 시간이 됐으려나..’


시계를 보니 3시 반쯤 되었다.

‘아직 시간 좀 있네. 준수 오빤 잘 살고 있나..’


민영은 문득 준수와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준수는 성격이 정말 젠틀하고 여자 마음을 알아서 척척 잘 알아주는 센스있는 남자였다. 준수의 집에서도 자주 만났는데, 집안 정리가 정말 깔끔해서 민영이 따로 정리해줄 게 없을 정도였다. 그 시절엔 정말 즐거웠는데..

‘준수오빤 어찌 살고 있으려나.. 좀 이르긴 한데.. 집이라도 한번 구경 가볼까. 아까 주소를 가르쳐줬는데..’


민영은 준수가 주소를 적어준 카톡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모아놓은 돈이 전혀 없다구?”

준수의 실토를 들은 수영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게..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 너랑 데이트하려고 차도 좋은 걸로 바꾸고, 좋은 데도 다니고 하다 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아놓은 돈이 전혀 없다는 게 말이 돼? 일 이천도 없어?”

“어.. 그 정도도 없어. 나 월급 받아서 그대로 카드값 메꾸면서 살아왔어..”


기가 찬 수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됐어, 오빠.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랑 결혼한다고 어떻게 아빠한테 말해. 나도 이제 그만둘래. 오빠, 잘 있어.”

“뭐야, 수영아. 그냥 갈려구? 아버님 어떻게 설득할지 궁리를 해봐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

“궁리는 무슨 궁리. 한푼도 없는 거지랑 어떻게 결혼하겠다고 해. 그만하자. 잘 있어, 오빠.”

“수영아.. 수영아?”


수영이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쪽으로 향했다. 준수는 다급히 말려봤지만, 들을 기세가 아니다.


마침 저 멀리 골목에서 민영이 준수의 원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쯤인 것 같은데..’








열린 설계와 소통으로 건축주, 시공사와 함께하는 건축을 만들어갑니다.


OPEN STUDIO ARCHITECTURE

글쓰는 건축가 김선동의 오픈 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김선동

Kim Seondong

대표소장 / 건축사

Architect (KIRA)

M.010-2051-4980

EMAIL ratm820309@gmail.com

www.openstudioarc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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