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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Jul 06. 2022

고백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22

뮐러 하우스 - 아돌프 로스

'장식은 죄악이다'를 부르짖은 아돌프 로스의 대표작. '라움 플랜'으로 대변되는, 단면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힌 공간 개념을 구현한 주택으로 유명하다. 외부는 매우 단정하고 심플한 구성을 하고 있다. 르꼬르뷔제 등 근대건축의 거장들보다 한발 앞서간 정신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준수는 소위 ‘멘붕’에 빠졌다. 준수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무리도 아니었다. 가난뱅이 건축설계사무소 직원으로 살던 그가 00공사 공채에 합격했을 때 그의 삶에도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때마침 같은 해 입사한 동기 중 대표이사의 딸이 있었던 것도 하늘이 주신 행운이었다. 여자를 상대하는 스킬을 최대치로 발산해서 수영을 꼬시는 것까지 성공했다. 뒷바라지 해온 민영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장기적인 인생 플랜으로 봤을 때 그건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결혼 약속까지 하고 부모님 상견례 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런데 자존심 때문에 집안을 지방에 유지처럼 포장했던 게 잘못이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도중에 거짓말 못하시는 부모님은 집안 사정을 솔직하게 다 말해버렸고, 대표이사는 집안 수준이 안 맞는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준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격노해서 파혼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찬스는 남아 있었다. 수영이 준수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수영과 연락하면서 대표이사를 설득하도록 하면 불씨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플랜 B도 필요했기에 설계사무소를 하고 있던 민영에게도 연락했다.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챙기던 민영도 자신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식지는 않았을 터. 심성 착한 민영을 잘 설득하면 그녀와 함께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잘 되가던 일이 갑자기 꼬여 버렸다. 민영을 만나기로 해 놓고 무리하게 수영까지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준수는 몇날 며칠을 밤마다 이불을 차며 후회했지만, 일은 벌써 벌어진 후였기 때문에 되돌이킬 순 없었다.


‘아.. 천하의 김준수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이제 어떡하면 좋아? 정말 외통수가 따로 없구나..’


그날 이후 수영과 민영에게 계속 연락을 취해봤지만 두 사람 다 전혀 반응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수영의 집에 찾아가서 만나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만 대표이사와 함께 살기 때문에 눈치가 보여 그것도 쉽지 않다. 하는 수 없이 민영의 사무실을 며칠째 가보고 있지만 불도 꺼져있고 아무래도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는 듯 했다. 


‘수영이 얘는 성깔이 있어서.. 당분간 되돌이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마음 약한 민영이를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게 쉬울 수 있어. 수영이는 당분간 잊어버리고, 민영이에게 집중하자. 근데 얘가 사무실도 안 나오고 전혀 연락이 안 되니.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지?’


준수는 민영이 작은 주택 하나를 설계하고 감리하고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용인 근방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 아마 그 근방으로 바로 출근하고 있는 모양이다. 준수는 건축판에 남아있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그 근방에 주택 신축 현장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민영은 준수가 계속 연락하고 사무실로 찾아온다고 하자, 당분간은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최근 작업하던 자료를 잔뜩 담아가지고 와서, 집 근처에 카페에서 일하던가 현장 근처에서 일하면서 대응하는 식으로 일하기로 했다. 1달 이상 이렇게 하다보면 준수도 지쳐서 포기하지 않을까 해서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내 임대료 내고 쓰는 사무실인데.. 에휴. 할 수 없지. 마음 약한 내가 참아야지...’


지훈은 민영이 예전보다 더 자주 현장을 나오고 협의 하면서 공사를 하자 신이 났다. 그러면서도 언제 고백을 해야 하나 나름대로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계절은 가을을 지나 초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여름은 혹서기도 있고 장마철이 있기 때문에 실제 공사 일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거기다 더울 때는 작업자들의 효율도 급격히 떨어지고, 더위로 인한 안전사고도 조심해야 한다. 가을은 날씨가 좋기 때문에 많은 시공사들이 진도를 많이 빼기 위해 스퍼트를 하는 계절이다. 한겨울이 되면 각종 습식 공사가 어려워지고 내부 공사도 힘들어진다. 지훈도 한겨울이 되기 전에 최대한 공사를 많이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지훈씨, 어떠세요. 내년 되기 전에 완공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솔직히 힘들지 않을까요. 최소한 설은 되야 어떻게 끝이 날 것 같은데.. 이게 참 될듯 될듯 쉽지가 않네요. 외부 조경 같은 건 날 따듯해져야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겨울엔 안되는 공사가 많아요. 외부 방수 공사 같은 것도 다 들떠버린다고 하죠. 아무튼 지훈씨 오신 이후로 착실히 공사가 되니까 한결 좋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여기 혹시 설민영 건축사님 계실까요?”

한창 작업하던 목수반장에게 낯선 남자 한명이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네? 설.. 민영? 글쎄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아 맞다. 성이 특이해서 기억난다. 우리 현장 설계하고 감리한 여자 분이 설 씨였어요.”

“아, 그래요? 설 씨 성을 가진 분이 몇 분 없긴 하죠. 설계하신 분 자주 오세요?”

“몇 주 전까지 거의 안 오더니 요샌 자주 오네요. 열심히 하기로 한건지. 거의 2~3일마다 오는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저희 설계사무소 소장님한테 무슨 볼 일 있어요?”

 목수 반장은 갑자기 찾아온 남자가 민영을 찾자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어디 수사기관에서 나온 것 아냐?


“아.. 개인적인 용건이 있어서요. 그럼 이 안에 계신거죠?”

“잠깐 기다려보세요. 성함을 말씀해주시면 전달해드리리다.”

“네, 김준수라고 합니다. 말하면 알 겁니다.”


준수는 지난 2주 동안 용인의 주택 현장 수십 군데를 쥐 잡듯이 찾고 있었다. 오늘도 2번째 집인데, 오늘도 허탕인가.. 했는데. 여기 있었구나. 여기서 반드시 민영을 설득해야 한다. 준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이, 건축사님. 누가 찾아왔는데.”

“예? 저를요? 제가 여깄는 걸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봐도 수상하길래 기다려보라고 했어. 김..준순가. 뭐 그런 이름이야.”

“예?? 준수오빠가 여기까지??”

민영이 준수의 이름을 듣고 경악했다. 더불어 옆에 있던 지훈의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졌다.


“소장님, 어떻게 된 건가요? 그 남자 정리된 것 아니었나요?”

“그게.. 하도 만나달라고 하고 사무실로 찾아온다고 해서.. 요새 사무실에 아예 안나갔어요. 여기 주변에 카페에서 일하고 그랬는데.. 전에 용인에 주택 하나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주변 현장을 찾아다니고 있었나봐요..”

“정말 지독한 놈이군요. 오늘 결판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랑 같이 가시죠.”


현장 앞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준수에게 민영과 지훈이 다가왔다. 둘 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다. 준수는 지훈을 알아봤다. 전에 찾아가서 한 번 본 남자다. 민영이 쟤는 혼자 나오면 되지, 저 남자는 왜 달고 나오지?


“민영아, 오랜만이다.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니.”

“.. 내가 왜 오빠 연락을 받아야 되는지 모르겠어.”

“내가 설명할 기회도 안주면 어떡하니. 그 날은 그 여자가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만난 것 뿐야. 그걸 니 맘대로 오해하고 가버렸잖아.”

“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 그 여자랑 하는 얘기 다 들었어. 매달려서 가지 말라고 애걸 복걸을 하던 걸 다 들었는데, 지금 그 말을 믿으라구?”

“그건 민영이 니가 혼자 생각하는 거고.. 그 여자랑은 완전히 끝난 얘기야. 그리고 그 일이랑 내가 너랑 일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오빠랑 나는 몇 년을 사귄 사이야.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일 적인 관계로만 만나자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어차피 나랑 다시 만날 생각으로 접근했던 거잖아.”

“민영아.. 그래. 내가 너랑 재결합하고 싶은 것 맞아. 나도 그걸 간절히 원해.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고. 그래서 그 여자 정리 한거잖아.”

“그게 정리한 거야? 다시 만나달라고 애걸 복걸한게 정리한거냐구?”


애시 당초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준수는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논리가 궁색하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어차피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지배하는 관계다. 마음약한 민영을 조금만 흔들 수 있다면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민영아. 내 마음은 진심이야. 날 믿어줘. 몇 년 동안 사귀어봤잖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니. 나 못믿어?”


준수는 급기야 과거의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던 지훈은 듣다 듣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저기요. 같은 남자로서 참 별로네요.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 전에 뵌 적은 있습니다만. 지금 저는 민영이와 사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간섭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만.”

“저도 그래서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근데 도저히 참고 들어줄 수가 없어서요. 남자가 그러지 맙시다. 속셈이 다 들통 났는데, 이제 와서 그런 구차한 변명 하고 싶습니까?”

“뭐라구요?”

“이 여자, 저 여자 간 보고 찝적거리는 거 다 들켰으면 그냥 미안하다고 물러날 것이지, 이제 와서 다시 만나달라고 질척거리는 거 진짜 추하지 않나요?

“뭐 어쩌구 어째요? 당신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거요? 말이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면 단줄 알아요?”


정곡을 찔린 준수가 발끈했다.

“왜요,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부잣집 딸 꾜셔서 인생역전 해보려다 안 되니까, 착한 옛날 여친 생각나서 찾아온 거 아냐. 근데 부잣집 딸도 아까우니까 그것도 못버리고, 여기 저기 낚싯대 꽂아두려고 했다 다 들켜버린거 아뇨. 다 파토나고 돌아갈 데 없으니까. 그래도 만만한 옛날 여친 찾아왔잖아. 아냐? 설 소장님이 아무리 착해도 당신 같은 쓰레기까지 받아줘야 되겠냐고??”


분을 못이긴 준수가 지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뭐 어쩌구 어째? 쓰레기? 당신.. 당신 말이면 단 줄 알아? 니가 민영이의 뭐라도 돼? 당신의 나랑 민영이 사이를 뭘 안다고 그딴 소릴 지껄이는거야??”


두 사람 사이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가운데 있던 민영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현장 사람들도 소리가 커지자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무슨 일이지.. 목수반장도 멀리서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소장님과 무슨 사이냐구?”

“그래! 니가 뭔데 우리 사이에 참견하고 난리냐고? 니가 뭔데 간섭하는 거야?”

듣고 있던 지훈은 갑자기 욱하는 것이 느껴졌다. 홧김에 준수에게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퍽!


얼굴에 펀치를 얻어맞은 준수는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민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 설 소장님 좋아하는 사람이야. 당신보다 훨씬.. 훨씬 좋아해. 내가 당신보다 소장님 훨씬 잘해줄 수 있어.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 주변에 얼씬거리는 거 더는 못 봐주겠다고.”

“뭐..?”


지훈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민영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지훈은 민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장님. 아니 민영씨. 이런 놈 잊어버리고 저랑 사귑시다. 저 민영씨 진짜 좋아해요.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민영씨만 생각했어요. 진심이에요. 저 민영씨 저런 놈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 더는 못봐주겠습니다. 이제 저런 놈 잊고 저랑 행복하게 살아요.”

“지훈씨..”


준수는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멀리서 지켜보던 목수반장이 준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봐, 멀리서 와서 고생한 건 알겠는데. 그만 가보지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상황정리 끝난 것 같은데 말야. 더 이상 망신당하지 말고.”


현장 작업자들이 전부 모여들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 좋은 상황이 아님을 직감한 준수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젠장.. 젠장! 당신! 나 때린 거 경찰에 고소할 거야! 각오해!”


준수는 허공에다 소리를 지르며 현장을 빠져나갔다.


지훈과 민영은 순간 어색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열린 설계와 소통으로 건축주, 시공사와 함께하는 건축을 만들어갑니다.


OPEN STUDIO ARCHITECTURE

글쓰는 건축가 김선동의 오픈 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김선동

Kim Seondong

대표소장 / 건축사

Architect (KIRA)

M.010-2051-4980

EMAIL ratm820309@gmail.com

www.openstudioarc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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