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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Oct 03. 2024

설계 대안 그리기

그 여름의 공모전 #07

    

  대지조사와 사례조사(프로젝트와 유사한 용도의 기존 건물들)를 마치면 본격적인 디자인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우드락 등의 재료로 대지모형(콘타)를 만들고 그 위에 얹어 볼 개략적인 건물 모형을 만든다. 이 모형은 스티로폼 혹은 아이소핑크라고 불리는, 스티로폼보다 좀 더  밀도가 높은 재료를 가공해서 만들게 되고 전체적인 스케일이나 면적,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 - 컨셉을 드러낼 수 있는 모형을 만들어서 매 주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체크를 받고, 의견을 듣고 반영하면서 자신의 설계안을 발전시켜 나간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당연히 휴일이지만, 매주 월, 목요일에 설계 수업이 있는 건축과 학생들은 거의 당연히 설계실에 모여 작업을 하곤 한다. 물론 일부 게으른 친구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설계 작업을 미루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주중에 미리 미리 좀 해 놓으면 되는 거 아니냐? 라고 타 전공 학생들 또는 일반인들이 말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자고로 마감 시간이 닥쳐야 발동이 걸리는 생물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건축과 학생들이 제일 자주 하는 말은 “니가 해봐야 안다”라는 것이다.       


“창민아, 이제 오냐? 설계 좀 했어?”

“어제까지 몇 개 짜놓긴 했는데.. 내일 교수님 보여드리려면 정리를 좀 해놔야 되서.”

“몇 개? 한 두 개가 아니고 몇 개나 짠 거냐?”

“학기 초에 알트(디자인 대안) 내면 3개가 기본 아냐?”

“그거야 너니까 가능한 거고.. 난 이제 하나 겨우 만들까 말까인데..”

“확실한 거라면 하나라도 괜찮지. 이지현 교수님은 어때? 괜찮아?”

“뭐 그냥 저냥. 확실히 잘 봐주시는 거 같긴 하더라고. 아직 사이트 조사 발표 밖에 안 해서 잘은 몰라.”

“그래, 열심히 해라.”     


옆 반의 절친 민준이와 대화를 마친 창민이 설계실로 들어선다. 이제 오후 4시다. 3~4명의 학생이 앉아서 각자 작업을 하고 있다. 아마 저녁 먹을 시간이 넘어가면 좀 더 많은 애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건축과의 설계실은 일종의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보면 된다. 20평 정도 되는 공간에 널찍한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다. 보통 가운데 큰 테이블을 놓고, 벽 주변으로 비교적 작은 책상을 빙 둘러서 놓는 형식으로 배치하는데, 주변 책상에 학생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컴퓨터로 설계 작업 내지는 모형 작업을 하고, 교수님이 오시면 중간의 책상에 모여 앉아 수업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컴퓨터는 좀 더 본격적인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데스크탑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추가로 듀얼 모니터, 프린터, 심지어 3d 프린터까지 들여놓는 친구들도 많다), 경제 사정이 좀 어렵거나 거기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노트북을 가져다 놓고 작업을 진행한다. 여기에 밤을 새는 친구들이 늘어나면 간이 침대가 들어오기도 한다. 학기 말의 마감 때가 되면 이 설계실에서 밥을 시켜 먹고 자기도 하는 등 거의 숙식을 해결하는 친구들이 생기기도 한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달리는 시기가 아니니까.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구나. 지수는 잘 하고 있나..’     


창민은 설계실 안을 느긋하게 거닐다가 같은 조였던 지수의 자리로 다가간다.      


“지수야, 잘 되가? 나오는 좀 거 있어?”     


사실 뭘 만들어야 될지 몰라 몇 시간 째 고민만 하고 있던 지수는 창민이 말을 걸자 움찔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아, 아니.. 글세.. 뭐가 잘 안 나오네.. 뭘 만들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사이트 조사나 사례 조사는 참 열심히 했던데.. 거기서 뭔가 좀 끌어내면 되지 않을까?”

“그, 그래.. 넌 잘 되가?”

“나도 뭐 그럭 저럭.. 암튼 열심히 해~.”     


다음 날 수업 시간. 예린은 차가 막혀 제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하기가 버겁다.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단체 카톡방에 문자를 남긴다.     


“교수님 좀 늦으신다는데?”

“아, 그래? 이왕 늦으시는 거 그냥 안 오시면 안 되나? 학기 초라 그런지.. 진짜 설계가 안되네..”

“넌 무슨 학기 초부터 그러냐.. 이제 시작인데.. ”     


10분 뒤 예린이 헐레 벌떡 설계실에 도착한다.


“여러분. 늦어서 죄송합니다.. 첫 번째 순서 학생이 누구죠?”

“아, 접니다. 교수님.”     


반장인 민호가 손을 들며 대답했다. 설계 수업은 보통 지도 교수가 한 학생씩 돌아가면서 설계안을 봐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지도 교수가 한 학생을 봐주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설계 작업을 진행한다. 지도 교수가 전체 학생에게 공통으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하면 모아놓고 일반적인 강의처럼 진행되기도 한다.  설계 안을 봐주고 지도해주는 과정을 보통 '크리틱'이라고 한다.     


매 학기마다 프로젝트를 잘 진행해왔던 창민과 민호는 역시 수월하게 안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특히 창민은 3~4개 정도의 대안을 한꺼번에 만들어와서 예린을 놀라게 만들었다.     

‘얘는 정말 생산량이 장난이 아니구나. 이 정도면 전부 다 최종 대안으로 발전시켜도 될 정도인데.. 정말 손이 빠르네. 다른 애들의 2~3배를 해치우니, 정말 잘하는 애가 맞긴 맞구나. 마감 때 어느 정도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이윽고 지수의 크리틱 차례가 되었다. 자신의 안에 자신이 없는 지수는 쭈뼛쭈뼛 예린에게로 다가선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그래. 이리 앉아. 왜 그리 안색이 안 좋니? 어제 너무 무리한 거 아냐?”

“예, 조금..”

“몇 시간 잤길래? 어제 몇 시에 들어갔어?

”한 다섯 시 쯤..“

”에? 그럼 몇 시간 자지도 않은 거네? 몸은 좀 괜찮아?“

”아, 괜찮아요..“

”그래, 고생했네. 어디 좀 보자..“     


지수의 안을 보는 예린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고, 스케일 감도 떨어지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 감이 도통 안잡히는 안이다.     


‘이게 뭐라도 방향이라도 좀 보여야 어떻게 말을 좀 해줄텐데.. 이건 정말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도 전혀 감을 못 잡겠네.. 이걸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사이트 조사나 사례조사 같은 건 정말 열심히 했던 친군데..’     

”지수야, 어때. 할 만해? 아직 감이 잘 안 오는 거 같은데.. 맘에 들었던 사례들 좀 들여다 보고.. 사이트 조사도 열심히 했었잖아? 거기서 뭐 끌고 올 만 한게 없었나?“

”저도 밤새도록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요.. 생각처럼 잘 안되네요..“

”그래.. 아무래도 처음엔 좀 헤맬 수 있어. 그러면서 차차 감을 잡아가는 거지. 일단 트레이싱지 펼쳐놓고 최대한 많이 그려봐. 모형도 많이 만들어보고. 사례조사 했던 것도 자주 들여다보고. 뭐가 잘 안 풀리면 어쨌든 작업량을 늘리는 수 밖에 없어. 나도 예전에 막힐 때마다 그렇게 했었고. 지수는 성실하니까 잘 할거야. 그래도 이 메스의 사선 형태는 좀 살릴 만 한 거 같은데.. 아무튼 좀 더 발전시켜서 다음 시간에 보자.“

”알겠습니다 교수님..“     


자신의 작업물들을 챙겨서 뒤돌아 나오는 지수의 걸음걸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교수님이 보시기에도 내 게 별로구나.. 하기야 내가 봐도 이게 맞나 싶은데, 교수님이 보기에 오죽 하시겠어.. 저번 학기 집합주택도 엄청 헤맸는데. 도서관도 만만치가 않구나. 더 열심히 해봐야지 뭐. 근데 무슨 방향으로 열심히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지수는 절로 한숨이 나온다.      


다음으로 미나의 차례가 되었다. 가뜩이나 수업시간에 늦게 온 데다, 딱 봐도 뭔가 작업을 안 해온 티가 확 난다. 보잘 것 없는 작업물을 두고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미나를 보니 예린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고작 이거 해 놓고 말은 정말 많구나. 안 해왔으면 그냥 안 해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미나야, 어제 이거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니?“

”글쎄요.. 한 3~4 시간 정도요?“

”내가 볼 때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양인데.. 어때?“

”아니에요 교수님. 저 어제 이거 진짜 고민 많이 하고 만든 거에요. 생각을 오래 해서 만든 시간이 짧아서 그렇지. 저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래.. 아무튼 설계 작업이라는 건 절대 시간이라는 게 필요해. 기본적으로 시간을 적게 투자해서는 괜찮은 걸 절대 만들 수 없어. 그리고 일주일에 2번 있는 설계 수업이 한 학기로 보면 아주 많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 매 시간 성실하게 해오지 않으면 학기 말에 그걸 한꺼번에 만회하기가 힘들어. 아무튼 이 점 명심하고. 다음 시간에 좀 더 시간 들여서 발전시켜 보자. 수고했어.“

”알겠습니다 교수님.“     


집으로 돌아온 예린은 남편과 수업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여보, 창민이란 애는 진짜 잘하던데. 다른 애들의 3~4배를 해오더라고.“

”그러니까. 거기다 그 3~4개가 다 괜찮아. 다 그대로 가도 될 정도의 안 들이었어. 확실히 잘 하는 친구인 건 맞는 거 같아.“

”민호란 친구도 괜찮은 거 같고..“

”미나란 친구는 진짜 한숨 나오던데.. 진짜 하나도 안 해오더라고.“

”걘 그냥 연예인 하려는 친구 아냐? 아예 설계에 관심이 없는 거 같던데.“

”글세.. 뭔가 해 오긴 해 오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학기말에 제대로 마감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수준이야.“

”뭐 알아서 하겠지. 마감 제대로 못하면 F 주는거지. 요새 애들은 옛날처럼 일일이 잔소리 해 봐야 듣지도 않아. 우리는 할 만큼 하고 성적으로 말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은 끌어올렸으면 좋겠는데..“

”지수란 친구도 좀 그렇던데. 뭔가 열심히는 하는데 나오는 게 별로 없어.“

”그러니까. 난 걔가 제일 안타까워. 사례 조사도 열심히 하고 사이트 분석도 열심히 하고.. 뭔가 열심히 하는 게 보이는데 막상 뭔가 그리고 만들려고 하니까 나오는 게 별로 없더라고.“

”설계라는 게 어쩔 수 없이 감각, 센스란 걸 요구하니까... 아직 학생이라 아직 그런 감이 좀 안 올 걸 수도 있지.“

”이제 벌써 4학년인데.. 아직도 그렇게 헤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참..“

”뭘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해. 우리가 걔들 부모도 아닌데. 최예린 씨 사람 챙기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무래도 여보가 나보다 더 교육자 체질인 거 같기는 하네.“

”아무튼 걔도 좀 잘 봐줘야 겠어. 사례도 더 많이 보여주고.“

”난 너무 답답하니까 내가 자꾸 그려주게 되던데.“

”글세. 난 교수가 직접 그려주는 건 애들한테 정답을 떠먹여 주는 거 같아서 좀 아닌 거 같아. 각자의 디자인은 각자가 알아서 찾아 나가야지.“

”나도 알긴 아는데.. 너무 답답하니까 그냥 반사 신경처럼 손이 나가버리니 참..“

”지수처럼 꽉 막혀버린 친구한테는 그런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가르치는 것도 각자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둘 다 설계 수업 지도는 처음이다 보니 어떤 방식이 맞는 건지 잘 알지 못한다. 일단 자기 방식으로 한 학기 진행해보고 개선해 나가고.. 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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