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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Sep 24. 2024

사이트 답사

그 여름의 공모전 #06

            

오늘은 이번 학기 설계수업 프로젝트의 사이트 답사가 있는 날이다. 지현은 담당 교수로서 몇 년째 보고 있는 사이트지만, 이제 바꿔야 하나 싶으면서도 선뜻 새로운 사이트를 제시하기가 겁난다. 조금 식상한 감이 있긴 하지만, 구관이 명관이라고 선임 교수들이 선정해놓은 사이트는 확실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학교에서 멀지 않아 학생들의 방문이 용이 하면서도 주변에 학교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많아 도서관 수요가 확실하다는 점. 하천을 끼고 있어 적절한 컨텍스트와 전망을 제공하면서도 삼각형 대지라 네모난 땅에서 나올 법한 아주 일반적인 안이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학생들의 특이한 안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 등이 이 땅이 가지는 이점이다.     


‘뭔가 식상한 듯 하지만 장점이 확실한 땅이라서.. 딱히 대체할 만한 땅을 찾기가 힘드네. 일단 올해까지만 이 땅으로 해보고. 다른 교수님들 의견 들어보고 다른 땅으로 바꿔 보던지 해야지 뭐.’     

오전 10시까지 학생들이 모이기로 했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하니 아이들이 이미 모여 북적거리고 있다. 이제 4학년이라 설계를 제법 해본 학생들이긴 해도, 대지 답사는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실제 건축가들도 설계를 하기에 앞서 대지 답사는 반드시 해보는데, 이제 설계를 시작하고 있는 학생들이야.. 당연히 대지에 와봐야 하지 않을까? 

    

지현은 먼저 와 있는 예린과 인사를 나눴다.

“어 일찍 왔네. 찾느라 힘들지 않았어?”

“생각보다 찾기가 쉽지 않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고.”    

 

지현은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가볍게 지도사항을 전달한다.

“학생 여러분, 다른 프로젝트 할 때도 대지 답사는 자주 다녀 보셨겠지만.. 대지에 다시 와보실 일이 그렇게 자주 없기 때문에 한 번 왔을 때 최대한 잘 살펴봐야 합니다. 주변 건물이나 교통 상황 같은 것도 정확히 파악해두고.. 가능하면 주변에 사시는 분들게 이것 저것 여쭈어 보고 설문조사 같은 것도 해보면 좋을 겁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마치자 학생들이 흩어져서 대지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사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다면 대지 답사를 그렇게 집중해서 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학생이 설렁 설렁 둘러보고 사진 몇 장 찍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창민은 같은 조인 지수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지수야, 뭐 볼 만한 것 좀 있어? 사실 이렇게 나와서 보는 거나 그냥 인터넷으로 로드뷰 둘러보는 거나.. 큰 차이 없지 뭐. 그렇지 않나?”     

지수는 설계 에이스라고 불리는 창민이 이런 소리를 하니 좀 놀랐다. 그래도 설계를 하는 데 대지조사는 꼭 해야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대지조사는 직접 나와서 꼭 해봐야지. 실제로 어떤지 살펴보고, 분위기도 느껴봐야 하고.”

“넌 좀 고지식한 편이구나. 난 학기 중에 공모전을 따로 더 뛰다 보니까 시간이 항상 부족해서. 뭐든지 좀 간편하게 해치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사실 난 이미 정해놓은 아이디어랑 메스가 있어서 그걸로 하려고 생각 중이야.”

“벌써? 그게 가능해?”

“평소에 인터넷 보고 서치해 놓은거나 스케치해둔 게 많으니까. 그 중에서 골라 쓰는 거지. 사실 설계에서 중요한 건 아이디어 아닐까. 이렇게 사이트 와서 살펴보고 거기서 뭔가 끌어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그런가..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건축설계에서 실제 대지를 직접 살펴보고 느끼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지수와 몇 마디 나누던 창민은 생각이 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얜 좀 꽉 막힌 스타일이네. 내가 주로 하는 건 국제 공모전인데, 그걸 사이트마다 다 찾아가 보고 설계를 할 수가 있나? 인터넷으로 대충 살펴보고 아이디어 짜내면 되는 거지..’     

“그래.. 알았어. 각자 하는 스타일이 있으니까. 아무튼 우리 과제는 인구구성이랑 주민 요구사항이지?”

“응. 인터넷으로 다 알아보긴 좀 힘드니까. 난 지나가는 사람들 좀 붙잡고 물어보려고.”

“뭘 그렇게까지.. 어차피 대지 조사라는 게 내 컨셉에 맞게 좀 조작이나 편집을 해도 되는 거잖아. 적당히 하면 되지 뭘.”

“음.. 난 그래도 되는 데 까진 해보려고. 이따 점심시간에 학생들 나오면 물어볼게.”

“그래, 알아서 해.”  

   

창민은 지수를 제쳐 놓고 나름대로 대지 답사를 시작했다. 아까 말했듯이 창민은 직접 나와서 대지 답사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고, 평소에 모아 놓은 자료나 인터넷 서치 등을 바탕으로 설계를 진행해가는 타입이다. 워낙 작업의 속도가 빠르고, 현장 방문이 어려운 공모전 위주로 많은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다.     

 

지수는 혼자 생각했다.

‘그래도 현장에 왔으면 최대한 많이 살펴보고, 주변 사람들도 만나 보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창민이는 공모전 위주로 하다 보니 그런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보네.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해봐야 겠다.’    

 

사이트 조사를 마치고 지수와 창민이 다시 모였다.

“우리 다음 시간에 발표할 ppt(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각자 생각한 방식대로 따로 만들어서 취합한 다음 발표하자. 각자 방식이 달라서 뭔가 같이 만드는 건 좀 어려울 거 같아. 발표 전날 공유해서 합치지 뭐.”

“그래.. 일단 알았어.”     

다른 방법이 없는 지수는 창민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사이트 조사 과제 발표날이 되었다. 수현(예린의 남편. 파트너 교수)는 오랜만에 학교에 나와 학생들의 발표를 듣고 있다. 사이트 조사는 아무래도 학생들마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나열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땅을 두고 아주 다른 내용을 조사하기도 힘들고, 아직 학생들이다 보니 특이한 관점이나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뭐야, 이 조도 또 이 내용이네.. 같은 내용을 몇 번째 듣는 건지 원. 뭔가 다른 얘길 하는 애는 없나..’     

그러던 와중에 창민과 지수의 조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이번 학년에서 가장 잘한다는 친구가 속해있는 조가 발표한다고 하니, 같은 내용만 계속 듣고 있던 수현은 그래도 기대를 가지고 발표에 집중했다.   

  

‘역시 다르긴 다르네.. 이런 방대한 자료들을 다 어떻게 찾아냈지? 나보고 하라 그래도 못할 정도인데..정리도 잘 되어 있고. 어떻게 분석해서 설계에 반영하겠다는 관점도 벌써 나오는 거 같고. 잘 하는 친구가 맞군.’

“창민 학생, 이렇게 많은 자료를 어디서 다 찾아냈죠? 대단하네요..”

“아, 제가 늘 보던 사이트들이 있어서.. 거기서 찾은 것들입니다.”

“나중에 저도 좀 알려주세요. 나도 도움이 될 정도인데..”  

   

창민의 발표가 끝나고 지수의 차례가 되었다.     

‘이 친구는 정말 사진을 많이 찍었네. 보통 이 정도로 많이 찍지 않는데. 그걸 다 꼴라주(사진끼리 편집해서 이어붙이는 작업) 하기도 했고. 직접 인터뷰한 영상도 있네.. 손을 많이 쓰는 부지런한 타입 같다.. 일단 열심히 하는 건 확실해 보이긴 한데. 약간 날카로운 센스? 같은 게 좀 안보이는 듯한 게 아쉽군.’     


“지수 학생은 사이트 조사부터 굉장히 성의있게 접근했네요. 꼼꼼하게 하신 게 보이네요. 특히 거주자들 만나서 직접 인터뷰한 내용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팀원이신데 창민 학생과 지수 학생은 그냥 따로 작업한 것 같네요? 팀이라면 같이 뭔가 만들어 내는 게 좋지 않나?”

“그렇긴 한데.. 시간도 잘 안 맞고 스타일도 다른 것 같아서 따로 하게 됐습니다.”

“음... 여러분 사회 나가서 회사 가시면 어떻게든 팀으로 작업하셔야 됩니다. 학생 시절부터 다른 학생들과 의견을 맞추고 함께하는 연습을 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수현은 자신도 학생시절 전혀 못하던 것들을 교수가 되었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하라고 지도 하고 있는 자신이 살짝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조의 사이트 조사 발표를 마치고 수현이 총평을 했다.

“자료를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자신만의 시각과 관점을 가지고 정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이트 조사라는 게 결국 설계에 ‘써먹을’ 것들을 골라내고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아무튼 자료의 단순 나열보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수현의 말을 듣는 창민은 ‘저 교수님은 나랑 참 비슷한 타입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는 생각이나 말들이 창민의 평소 생각과 꽤나 비슷했다. 창민을 보는 수현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만 좀 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전통적인 설계 방식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꼭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이트 조사 발표가 끝났다. 이제 각자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디자인 대안을 짜내는 과정으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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