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공모전 #08
어느덧 중간 크리틱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중간 크리틱은 한 학기에 중간 즈음에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 학년의 건축과 학생들이 모두 모여 중간 체크를 받는 과정이다. 어느 정도 일단락을 지어서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설계안이 완전히 마무리되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의 방향성은 보여져야 한다. 즉, 작품에 담길 생각, 컨셉이 보여야 하고 평면이나 단면의 개략적인 방향, 조닝 정도가 보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결정되면 좋지만, 그게 안 되어서 그 이후에 방향을 전환하는 경우도 많다. 중간 크리틱 정도가 작품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마지노선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때까지 뭔가 결정이 되지 않으면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학생들이 마무리하는 데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중간 크리틱 때는 항상 보던 담당교수님이 아니라 다른 반 교수님께 평가를 받거나 외부에서 초청인사를 불러 크리틱을 받는 경우가 많다.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서다. 학기 말에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최종 크리틱을 진행한다.
오늘은 수현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주로 다음 주 중간 크리틱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상대로 창민과 민호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특히 창민은 거의 최종 마감 수준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평면이나 내부 렌더링까지 나와서 누가 보면 최종 마감 아니냐고 할 정도다.
‘얜 지금 수준이 거의 다른 친구의 최종 마감 수준이네. 별로 할 얘기가 없을 정도야. 역시 알아서 잘 하는 친구군. 진짜 나중에 우리 회사 올 생각 없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네..’
문제는 역시 지수다. 다음 주가 중간 크리틱인데 뭔가 정해진 게 없다. 아니, 뭔가 들고 오기는 하는데 이걸 그대로 갈 수 있을지 의심이 되는 수준이다. 지수의 설명을 다 들은 수현이 고민에 빠진다.
”음.. 지수야. 이대로 괜찮을지 모르겠네. 지금 창문이나 입면 같은 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어. 메스의 방향이 나오지 않았는데, 창문 패턴 같을 걸 고민하는 건 아무 소용 없는 짓이야. 넌 이 안이 맘에 들어? 어때?“
”저도 맘에 딱히 맘에 드는 건 아닌데.. 아무리 해봐도 그다지 나오는 게 없어서..“
”음.. 어떻게 하지.. 참.“
사실 뭔가 그려내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수현은 지수의 고민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빈 종이에 이런 저런 안들을 잔뜩 그려준다. 하지만 지수가 스스로 그리는 안이 아니기에, 지수가 자신의 안으로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교수님이 그려 주시는 게 좋은 건 알겠는데요.. 이건 제가 그린 게 아니다 보니까.. 뭐랄까 저작권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냥 받아서 쓰기가 좀 그래요..“
”그래. 나도 답답해서 그려주는 거니까. 이게 물론 니 안은 아니지. 아무튼 참고만 하고. 뭐가 됐든 다음 시간엔 뭔가 마무리를 해서 보여줘야 하잖아. 어쩔 수 없으니까 오늘 들고 온 이 안으로 해서 정리해서 발표하자. 일단 다른 교수님들 말씀도 좀 들어보고. 거기서 다시 출발해야지 뭐. 피티도 어떻게 보여줄지 생각도 좀 해 보고.“
미나는 오늘도 거의 해온 게 없다. 이걸로 중간 크리틱을 어떻게 받을지 걱정되는 수준이다.
”미나야.. 이걸로 그냥 중간 크리틱 받아도 돼? 지도 교수인 나도 걱정이 되는 수준인데.“
”음.. 저도 완전히 맘에 드는 건 아닌데.. 컨셉 자체는 좋으니까 괜찮은 거 같아요.“
미나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듣고 있자니 수현은 속으로 어이가 없다.
‘뭐? 컨셉은 괜찮다고? 완전 이상한데.. 얜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이 넘칠까. 생각도 없고, 해오는 것도 없고, 시간 투자도 안 하고.. 솔직히 설계를 왜 하는건지 조차 모르겠는데.’
”미나야. 오늘 내가 좀 솔직히 이야기해도 될까. 인생 상담 같은 건데 말야.“
”네, 뭔데요?“
”너 설계하는 거 어때? 괜찮아?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어 보여서 말야. 연예인.. 아이돌 같은 거 준비하는 거 같던데. 거기 시간 많이 쓰면 설계 작업 잘 못하잖아.“
”저도 안그래도 고민이에요.. 여기까지 왔으니까 졸업은 해야겠긴 한데.. 그 쪽 분야를 완전히 놓아버리지도 못하겠고.. 오디션 준비도 해야겠고..“
”이 건축설계라는 게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되는 일이야. 어중간하게 해서는 나오는 게 없어. 지금이라도 그 연예인 하는 쪽으로 그냥 올인하는 게 어때?“
”그게 오디션을 자꾸 떨어지니까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서.. 큰아버지가 졸업만 하면 자기 회사에 취직시켜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학교도 졸업은 꼭 하고 싶어요.“
”아, 큰아버지가 설계사무소 하신다고 했지.. 참. 아무튼, 무슨 일이든 어중간하게 하면 되는 게 없는 거 같아. 연예계 쪽은 나는 잘 모르니까.. 아무튼 니 인생은 니가 알아서 사는거지만 걱정이 돼 가지고. 다음 주 발표는 어떻게든 정리해서 해 보자.“
중간 크리틱 날이 되었다. 강당과 같이 비교적 넓은 전시 공간에 학생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주욱 늘어놓고 있다. 각자의 차례가 되면 앞으로 나가서 교수님들에게 각자의 안을 설명하고 코멘트를 받는다. 중간 크리틱은 간단한 평면도와 스케치, 우드락 또는 폼보드(판으로 된 모형재료) 등으로 제작한 스터디 모형(최종 모형을 만들기 전에 가능성을 체크하기 위해 만드는 중간 모형) 정도를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임 교수인 지현이 예린과 대화를 나눈다.
”예린아, 너희 반 어때. 준비 잘 했어?“
”글세.. 이 정도로 괜찮을지 모르겠네. 다들 아직 좀 모자란 거 같아서. 다른 반 학생들이 훨씬 더 잘한 거 같은데.. 약간 부끄럽네.“
”에이 무슨. 너희 반도 잘했던데. 창민이나 민호는 정말 잘했더라고. 설계 거의 다했던데.“
”걔들이야 워낙 잘하는 애들이니까. 나도 걔들은 걱정 안해. 못하는 애들이 걱정이지.. 특히 지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 걔.. 걔가 열심히는 하는데 나오는 게 없어서 고민인 타입이지.. 작년 지도 교수님도 걔 때문에 고민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
”아무튼 이따 우리반 크리틱 좀 잘 해줘.“
발표 시간이 되어 학생들이 한 명씩 발표를 시작했다. 민호의 발표가 끝나자 A반의 김교수가 찬사를 쏟아냈다.
”민호 학생, 아직 중간 크리틱인데도 완성도가 굉장히 높네요. 스케일이나 비례도 좋고.. 컨셉도 분명해서 누가 봐도 의도를 잘 알거 같아요. 조금만 더 보완하면 최종 마감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네요.. 민호 학생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역시 훌륭합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어지는 칭찬을 듣고 있자니 수현은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받았다.
‘총장 아들이라서 그런 건가? 칭찬이 너무 과한 거 아냐? 물론 꽤 잘하긴 했지만.. 그렇게 치면 아까 창민이가 훨씬 더 잘했는데. 그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 이렇게까지 아부를 해야 하는건지 원..’’
이제 지수의 차례다. 예린과 수현은 물가에 내놓은 자식을 보는 것마냥 안절부절한 마음이 된다. 다른 반 교수님들이 지수의 작업을 보고 좋을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라는 마음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이지수입니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지수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니 거의 들리지 않는다. 지현이 그런 지수를 위로했다.
”지수 학생, 너무 떠는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진정하고요. 목소리 좀 크게 해주면 좋겠네요.“
5분여의 발표가 끝나자 전시실에 정적이 감돈다. 다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게, 작품 자체는 뭔가 열심히 하긴 했는데 요점이 잡히지 않고 어떻게 하고 싶다는 방향성도 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하긴 했으니 열심히 안 했다는 식으로 비판하긴 힘들고, 비판을 하자면 어떤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걸 단시간에 생각하기 힘드니 다들 고민에 빠진 것이다.
고민하던 지현이 어렵게 먼저 말을 꺼냈다.
”지수 학생.. 열심히 한 건 알겠네요. 굉장히 성실하게 작업을 한 것 같은데.. 지수 학생이 하고자 하려던 게 뭐죠?“
”네.. 저층부에 공용 공간을 최대한 열어줘서 주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하천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상부 도서관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려고 했고..“
”음.. 그건 알겠는데.. 그게 메스나 평면에서 잘 읽히지가 않으니까..“
교수들이 고민에 빠져 있는데, 아까 민호를 칭찬했던 김교수가 입을 열었다.
”지수 학생. 평소에 어떤 생각으로 설계를 하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러니까 얼마나 진지한 자세로 설계 작업에 임하고 있는지를 묻는 거에요.“
왜 설계와는 상관 없는 저런 걸 묻는 거지? 수현은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돌려 김교수를 바라보았다.
”무.. 물론 최대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좋아 보이는 것,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그냥 끌어다가 만든다고 다 되는 건 아니라는 거에요. 지수 학생이 한 것은 제가 볼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좋아 보이는 도서관 사례 보고 이거 저거 뜯어다 붙인 느낌이 납니다. 어떤 도서관을 만들지, 그리고 어떻게 나만의 건축, 공간을 만들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생각이 없다 보면 이런 건물이 나오는 거에요.“
”...“
갑자기 비판이 쏟아지자 안 그래도 긴장했던 지수의 머리 속이 하얘지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꼭 비교하자는 건 아니지만.. 아까 민호 학생의 작품 좀 보세요. 도서관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입니까. 그런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에요.“
여기서 꼭 저런 식으로 비교를 해야 하나? 굳이 민호를 들먹이면서 편드는 코멘트를 듣고 있자니 예린과 지현은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무튼 이런 식의 작업은 아무리 시간 많이 들여 봐야 소용 없습니다. 쓸데없이 하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 보다 못하다는 거에요. 아시겠죠? 한 시간의 작업을 하더라도 건축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하셔야 합니다. 남에 거 그냥 적당히 베끼는 게 아니라요. 지수 학생은 레퍼런스.. 남의 건축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도서관이나 설계실에 앉아서 책만 보지 마시고, 나가서 많은 체험을 하고 좋은 건축도 직접 보시고.. 하시는 게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무튼 지금 이 안은 그냥 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뭘 했는지 모르겠고, 발전 가능성이 하나도 안 보여요. 반 학기 보내신 시간이 아깝네요. 다른 학생들 하신 거 잘 보고, 그리고 교수님이랑 이야기 잘 해보시고, 다른 방향을 좀 잡아봐요. 그리고..“
지적하는 교수의 감정이 격해지고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게 느껴지자 지현이 제지하고 나섰다.
”김교수님. 그 정도 말씀하시면 지수 학생이 충분히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다른 교수님들 말씀도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그 정도로 해 두시죠..“
지적하던 김교수도 자신의 감정이 격해졌다는 걸 느꼈는지 조금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목소리가 조금 커졌던 것 같네요. 그럼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다른 교수님들의 크리틱도 이어졌지만, 김교수가 워낙 세게 말해놓아서 다른 말들은 지수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지수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되어 제 자리로 돌아왔다.
”김교수님, 너무 세게 말하시는 거 아냐? 지수가 그다지 잘한 건 물론 아니지만.. 저 정도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니까. 무슨 인생 크리틱을 하고 있어. 그냥 안에 대해서만 말하면 되지. 저 교수님은 항상 감정이 격해지면 저런 식으로 말하더라.“
뒤에서 발표를 듣고 있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던 창민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저 교수, 무슨 말을 저렇게 하지.. 그래도 지수가 열심히 한 건 누가 봐도 맞는 건데. 건축에 임하는 자세라고? 무슨 종교 활동 하는 줄 아나?’
강의실 맨 구석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은 지수는 저절로 얼굴이 빨개지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이걸 하려고 몇 날 며칠을 밤새면서 준비했는데.. 내가 건축에 대해 진지하지 못하다고? 내가 한 건 쓸데 없는 거고 다른 친구들 한 거 잘 보고 다시 하라고? 김교수가 한 말들을 곱씹고 있자니 나란 존재가 하찮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가장 친한 친구가 와서 위로를 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수에게는 그런 친구조차 없었다. 멀리서 창민이 그런 지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중간 크리틱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예린과 수현이 대화를 나눈다.
”그 김교수란 사람, 진짜 이상하던데.. 크리틱에 요점도 없고..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하잖아.“
”그러니까. 잘한 것도 그냥 잘했으니까 잘한거고, 못한 것도 그냥 못했으니까 못했다고 하면 크리틱 누가 못해. 잘했으면 어떤 점을 잘했고, 못한 건 어디가 이상하니까 이렇게 고쳐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정상 아냐.“
”지수 차례엔 내가 다 민망하던데.. 디펜스 해주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았네. 무슨 건축을 대하는 자세? 그런 얘길 하고 있어. 자긴 얼마나 잘하고 있길래 그런 소릴 해?“
”진짜 무슨 인생 크리틱을 하고 있던데. 민호 칭찬할 땐 어찌나 심하게 편을 드시던지. 진짜 못 들어주겠더라.“
”왜 그런 사람이 교수를 계속 하고 있지? 이해가 안 되네..“
예린과 수현은 크리틱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작은 설계 스튜디오도 어찌 보면 작은 사회에 가깝다. 오만 사람이 다 모여 있고, 그에 얽힌 이런 저런 스토리들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이미 사회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