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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Oct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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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공모전 #09


중간 크리틱이 끝나고 지수가 속해 있는 B반 학생들은 뒤풀이로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너희들 안 피곤해? 난 죽을 거 같은데..“

”아무리 힘들어도 좀 놀아야지. 안 그래? 지금 안 놀면 언제 놀겠어. 마감 때 까지 계속 바쁠텐데.“

”가고 싶은 사람만 가자. 가기 싫은데 억지로 따라갈 필요 없어.“     

안 그래도 사교성이 떨어지는 지수는 크리틱 때 김교수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그저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다.     

”얘들아, 미안해. 난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그냥 집에 가서 쉴게.“

”그래? 아쉽네. 오늘 많이 힘들었을텐데. 그럼 오늘은 들어가. 다음에 같이 놀자.“

민호의 말에 ‘나도 그냥 한번 가볼까..’라는 생각이 드는 지수였지만, 아무리 민호가 있더라도 오늘은 도저히 따라갈 기운이 안 난다. 지수는 쓸쓸히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이런 애들 따라가서 술 마셔 봤자 재미도 없고.. 나도 그냥 집에 가자.’

창민 역시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미나가 말했다.

”나도 갈게. 오늘 아니면 너희들이랑 또 언제 친해지겠어. 나도 가도 되지?“

”당연하지. 넌 평소에 오디션 연습 땜에 너무 바빠서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잘 됐네. 같이 가서 놀자.“ 


    

미나가 참석한다는 말에 창민은 생각을 바꿨다.

”나,, 나도 갈게.“

”창민이 니가? 너 술자리 같은 건 진짜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 알았어. 대충 인원 정해진 것 같은데. 자 이제 가자~“                    



여기는 진성 그룹 부회장실.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는 최정만 부회장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린다.      

”아.. 안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누구야? “

번호를 확인한 최정만 부회장의 표정이 바뀌고, 서둘러 전화를 받는다.

”어 그래. 윤 비서. 뭐 좀 알아냈어?“

”예, 부회장님. 말씀하신 그 분들, 대충 어디 있는지 소재 파악 됐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그래, 어디 살고 있어?“

”인천에 살고 있구요. 남편은 조그만 빵집을 하고 있고, 딸은 대학생입니다.“

”아, 그래? 남편은 재혼 했어?“

”아뇨, 안 하고 둘이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딸은 인천에 I대를 다니는 것 같습니다. 건축학과고요.“

”그렇군... 확실한거지?“

”저희 생각엔 맞는 것 같습니다만....오늘 직접 가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반응 보면 맞는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녀 와서 다시 보고해.“     



저녁 8시. 인천 변두리에 있는 한 사거리. 지수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빵집이 있다. 지수 아버지가 영업을 마치고 귀가 준비를 하고 있다.     

‘요새 들어 밀가루 값도 오르고 알바 한 명을 써도 인건비가 너무 세니 장사하기가 정말 쉽지 않아... 게다가 사거리 바로 건너편에 프랜차이즈 빵집까지 들어온다고 하니.. 걱정이다 정말.. 어떻게든 내년에 낼 지수 등록금은 마련해야 되는데..’     

지수 아버지가 살림살이 걱정에 한숨을 쉬며 가게 정리를 하고 있는데, 낯선 손님 한 명이 문을 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지금 마감시간이라 남은 빵이 거의 없는데.. 그래도 괜찮으시면 한번 골라보세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내는 빵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가게 안을 둘러본다. 아무래도 슬금 슬금 이쪽 눈치를 살피는 분위기다.     

‘저 사람 뭐지? 빵은 안 보고, 내 눈치를 보고 있잖아?’

”손님, 저 한테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까부터 제 눈치만 보고 계신 거 같아서..“

”음.. 티가 났나 보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앉아서 말씀 좀 나눠도 괜찮을까요?“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과 이야기를 하자고 나서자 지수 아버지는 적잖이 당황했다. 뭐지? 어디서 빚진 것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지수 아버지였지만, 일단 물 두 잔을 따라서 테이블에 앞에 앉는다.     

”전에 뵌 기억이 없는 분인데.. 무슨 일로 절 찾아 오셨죠?“

양복 입은 사내는 안주머니에서 주섬 주섬 명함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내려 놓는다.

”전 진성 그룹의 최정만 부회장님 지시를 받고 온 사람입니다. 이민수 님 맞으시죠?“

진성그룹? 그럼 진성 백화점 쪽에서 나온 사람인가.. 지수 아버지 머리 속에서 까마득한 옛날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진성그룹.. 그럼 혹시..“

”음. 이제 기억이 나시는 것 같은데요. 아마 사별하신 와이프분이 계실 겁니다. 맞죠?“

취조하듯 물어보는 양복 입은 사내에게 지수 아버지는 경계심이 확 일어났다.

”그건 어떻게 아셨죠? 제 뒷조사를 하신 건가요?“

”음.. 그건 다 방법이 있고요.. 아무튼 사별하신 사모님께서 저희 진성 그룹 회장님의 막내딸이었습니다. 아마 그것도 아실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민수(지수의 아버지)가 파리에서 만난 진희(지수의 어머니)는 자신의 출신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서울에서 조그만 가게를 한다는 식으로만 말하곤 했다. 조그만 가게를 해서 딸을 어떻게 프랑스로 유학 보내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민수 역시 가난한 집에서 자란 처지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유학을 왔겠지.. 라는 식으로 크게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희가 연락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주변에 물어보니 한국에서 아버지가 급하게 불러 귀국했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몇 주 있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난 진희는 민수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빠, 나 사실 재벌집 딸이야.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

”뭐? 재벌?“

”서울에 진성 백화점이라고 알 거야. 거기 회장이 우리 아빠야.“

”세상에.. 진성 백화점이라면 서울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잖아. 그게 진짜야?“

”내가 오빠 앞에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어. 다 사실이야. 내가 오빠랑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아빠가 날 서울로 부른거야. 날 다른 재벌집 아들이랑 결혼시키겠다는 거지. 죽어도 못한다고 하니까 당장 집에서 나가래. 그래서 도망쳐서 다시 온 거야.“

”나 너무 혼란스럽다 진희야..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되지?“

진희는 넋이 나간 민수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빠, 나 오빠만 믿고 파리로 다시 돌아 온거야. 나 오빠랑 살 수 있다면 재벌집 딸이고 뭐고 그런거 다 필요 없어. 재벌집 딸.. 그거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좋아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 있으면 정말 숨이 막혀. 거기서 도망치려고 파리로 유학 오겠다고 한 거고. 여기서 오빠 만난거 난 진짜 운명이라고 생각해. 오빠, 나랑 함께 살겠다고 약속해줘. 부탁이야..“

”진희야..“     



진희의 진심을 들은 민수는 앞으로 진희와 평생을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파리의 작은 성당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둘 만의 가정을 꾸린다. 얼마 안 있어 지수가 태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몸이 급격히 나빠진 진희는 입원을 하고 말았다.     



”오빠, 우리 지수 잘 부탁해.. 난 이제 힘들 거 같아..“

”진희야, 약하게 마음 먹으면 안 돼. 우리 가족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아야지..“

”아니야.. 난 이제 오래 살긴 힘든 것 같아. 오빠, 난 그래도 오빠랑 결혼한 거 후회 안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 정말 행복했어. 나랑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     



그렇게 진희를 떠나보내고 민수는 젖먹이 지수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밑바닥부터 고생 고생 해가며 이 가게를 차리고 꾸려오면서 20여년 간 홀로 지수를 키워 온 것이다.       



”이민수 씨가 대충 어떻게 살아 오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뭐죠?“

”진성 그룹 최진무 회장님께서 댁의 따님.. 이지수 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따님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만나 보는 걸로 끝인 건가요?“

”제 생각에 그 정도로 끝날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진성 그룹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실 것 같습니다. 회장님 댁에 들어와서 살라고 하실 수도 있고요.“

”그건 안 됩니다. 지수는 누가 뭐래도 제 딸입니다. 20년을 키워 왔습니다. 아무리 재벌 집안이라지만 갑자기 남에 집에 들어간다는 건 제가 절대 허락 못합니다.“

”아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직 회장님 생각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일단 회장님 따님의 가족분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 오라고만 하신 거라서요. 아무튼 이렇게 확인을 했으니 저희들도 일단 가서 보고를 하겠습니다. 그걸 듣고 회장님께서 지시가 있으시겠죠. 저희도 그걸 듣고 움직이는 거라.. 아무튼 오늘 제 용건은 이 정도면 마무리 된 것 같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양복 입은 사내를 보는 지수 아버지의 심정은 매우 복잡해졌다.

‘재벌집 회장이 자기 손녀를 찾아 나섰다.. 이제 지수.. 그리고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거지? 저 회장이 우격 다짐 지수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김 교수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아직도 정신이 없는 지수는 터덜터덜 아빠의 빵집으로 향했다. 이 시각이면 아마 장사를 마칠 시간이고, 같이 집에 가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빵집으로 향하는 지수의 눈 앞에 양복을 입은 사내가 지나갔다. 지수를 흘끗 본 사내는 갑자기 멈춰서 지수에게 말을 걸었다.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이지수 양인가요?“

”예, 예? 맞긴 맞는데요.. 처음 보는 분인데.. 절 아시나요?“

”그렇군요. 지수양 아버지를 뵈러 온 사람입니다. 아버지랑 닮으셔서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럼 이만.“

자기 할 말을 마친 양복 입은 사내는 거리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누구지.. 아빠를 만나러 온 사람이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이상하네..’     



지수가 빵집에 들어서니 아빠가 구석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있다. 뭔가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아빠! 나 왔어. 오늘 장사 안 끝났어?“

”아, 아.. 지수 왔구나. 그래, 이제 정리하고 있어. 밥은 먹었어?“

”아직.. 방금 이상한 사람 지나가던데. 아빠를 찾아왔다고 하던데. 내 이름을 알더라구. 아빠랑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아, 아.. 그냥 거래처 사람인데 지나가다 들렀다고.. 저기 걸려있는 우리 사진 보고 니 이름을 묻더라고.“

당장 사정 얘기를 다 하기 어려운 지수 아버지는 급한 김에 거짓말로 둘러댔다. 

‘조만간 그 사람들이 또 찾아오거나 할 텐데.. 그땐 지수한테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오늘 무슨 크리틱? 평가 받는 날이라면서. 그건 잘 했어?“

아빠의 물음에 지수는 금방 울 듯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빠.. 나 오늘 완전 망했어.. 나 설계 그만할까봐. 진짜 너무 힘들어..“

”왜 그래 우리 딸. 이리 와서 앉아 봐.“

지수는 아빠 앞에서 오늘 겪은 일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교수란 사람 진짜 이상하네..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다니. 진짜 얼굴 한 번 보고 싶네.“

”그러니까. 나 진짜 발표하다가 울 뻔 했어..“     



여기는 B반 학생들의 술자리. 미나가 온다고 해서 따라왔지만, 창민은 이런 자리가 영 어색하다. 할 말도 없고, 재미도 없고.. 슬슬 핑계를 대고 집을 갈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미나가 옆에 와서 이야기를 걸어온다.     

”창민아, 넌 어떻게 그렇게 설계를 잘 하니? 진짜 신기하더라. 나도 좀 가르쳐 줘.“

미나가 말을 걸어오자 창민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 그야 예전부터 계속 그렇게 해 왔으니까.. 너도 잘 하던데 왜..“

여자를 상대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창민은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창민아, 넌 여러 개를 한꺼번에 만드는 것 같던데. 진짜 빨리 하더라. 그럴 거면 하나만 제대로 하고 나도 좀 도와줘. 난 하나 만들기도 너무 벅차더라. 니가 도와주면 진짜 도움이 될 것 같아. 나중에 부탁 좀 할게.“

”그, 그래.. 여유가 되면 도와줄게. 근데 설계 작업은 직접 해야 실력이 느는데..“

”그야 그렇지만. 내가 오디션 연습하고 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없어서..“

갑자기 미나가 창민에게 팔짱을 끼고 교태를 부리기 시작하자 창민은 식은 땀이 흐르고 정신이 없어진다.

”그, 그래.. 알았어. 담에 꼭 도와줄게.“

”정말? 창민아, 너 약속한거야? 꼭 도와줘야 돼, 알았지?“     

창민은 뭔가 코가 꿰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런 구실로라도 미나와 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기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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