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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Oct 18. 2024

진행

그 여름의 공모전 #10

 

오늘은 수현의 수업 날이다. 지수의 크리틱 차례가 되자 수현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 얘한테 뭐라고 말하지.. 중간 크리틱 때 너무 혼나서... 일단 뭐라도 위로를 좀 해줘야 겠지.. 그리고 뭔가 발전 방향을 말해줘야 되는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네. 결국 얘 스스로 찾아내고 헤쳐 나가는 수 밖에 없어.’     


”그래, 지수야. 잘 지냈어? 중간 크리틱 땐 힘들었지?“

”네..“

”그래. 김 교수님이 원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을 것 같은데. 아무튼 내가 봐도 말씀을 좀 심하게 하신 것 같아. 니가 해온 것도 충분히 발전 방향을 찾을 수 있었는데.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오늘 해온 것 좀 보자.“


평소라면 뭐라도 들고 왔을 지수가 쭈뼛쭈뼛 말을 못한다.       

”네, 교수님.. 그런데..“

”음. 오늘 작업을 별로 못 해온건가?“

”네, 죄송해요.. 중간 크리틱 때 꾸중을 너무 많이 들어서..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겠더라구요..“

”그래, 할 수 없지. 나도 니 입장이라면 그랬을 거야. 음..  지수야. 일단 지금까지 스터디 했던 모형들 다 가져와 봐. 스케치도 좋고. 암튼 했던 걸 다 꺼내봐. 그걸 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 해보자.“     


수현은 오늘 지수와 크리틱을 한 시간을 하든, 두 시간을 해도 좋으니 뭐라도 방향을 정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중간 크리틱이 끝났으니, 반 학기가 남은 거라고 봐야 겠지. 사실 이 정도 시점에서 프로젝트 방향이 대략은 결정 되야 돼. 안 그러면 남은 반 학기동안 그걸 메꾸기가 정말 힘들거든. 중간 크리틱 정도에서 방향이 결정된 친구는 천천히 자기 페이스 대로 해나가도 최종 크리틱 때 괜찮은 퀄리티를 만들어 내기가 수월하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는 지금부터 빠짝 스퍼트를 해서 달려 나가도 일정 수준 이상 퀄리티를 만들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대안 결정을 빨리 하는 게 중요해.“

”네.. 저도 이제 4학년이라 이전 학기들 보면 그런 거 같긴 하더라고요.“

”아무튼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앞으로의 방향을 생각해보자. 음. 결론적으로 니가 하고 싶은 컨셉이 뭐였지?“

”저층부를 최대한 열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광장처럼 쓰고, 하천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하고.. 그런 흐름이 상부의 도서관과 연결되도록 하는.. 뭐 그런 거에요.“

”그래, 대충은 알겠는데.. 음. 그럼 이런 메스 방향은 어떨까..“     

수현은 그 동안 지수가 만들었던 대안들을 전부 들춰보며 어떤 방향이 좋을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시간. 이번엔 예린의 수업 차례다. 역시 예린에게도 지수가 최대의 난관이자 가장 신경 쓰이는 학생이다.      

‘수현이가 그동안 해왔던 걸 전부 꺼내서 제일 괜찮은 방향으로 나름대로 정리해줬다고 했는데.. 오늘은 과연 뭘 해왔을지..’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래, 오늘은 작업 좀 해왔어? 어디 좀 보자.“     

어라. 오늘 들고 온 메스 모형을 보니 뭔가 갈피가 좀 잡힌 모양새다. 확실히 수현이 빠짝 붙어서 챙겨줬더니 그래도 발전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아니면 지수 스스로 뭔가 눈이 뜨여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래도 후자였으면 좋겠다는 것이 예린의 생각이었다.     

”오, 그래. 이제 뭔가 좀 나오는 것 같은데. 대지의 축이랑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방향 잘 잡은 것 같은데.“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컨셉을 다시 좀 잡아봤는데요..“

”컨셉? 컨셉은 대강 잡혀 있는 거였잖아. 저층부에서 최대한 열고 그걸 상층부로 이어간다.. 뭐 그런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그것만으론 좀 부족한 것 같아서. 다른 친구들처럼 키워드처부터 다시 잡아 봤어요.“

”그래? 그게 뭔데?“

”‘같이하는 통섭과 공유의 광장’이라고 붙여 봤는데..“


갑자기 ‘컨셉’이라고 지수가 들고 온 어려운 단어의 나열을 듣자 예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교수님이 왜 대답이 없으시지.. 내 컨셉이 맘에 안드셨나. 다른 반 친구들 보니까 다들 이런 식으로 컨셉을 잡고 시작하던데..’     

한참을 생각하던 예린이 비로소 말을 꺼냈다.

”지수야, 컨셉이 뭐라고 생각하니?“

”네? 그거야 설계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되는 생각.. 그런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설계에서 컨셉이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없어도 되는 것일 수도 있어.“

”네? 그게 무슨 뜻이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은 지수는 혼란스러워졌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접하는 많은 건물들.. 이를테면 학교나 상가, 집 같은 것들 말야. 그런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그럴듯하고 심오한 컨셉 없이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어. 그저 사용자의 요구사항이나 주변 상황, 법규... 그리고 하자 없게만 지어도 충분히 좋은 건물이 될 수 있지. 아니, 그런 건물이 우리가 괜히 디자인 한답시고 이상한 시도를 하는 건물보다 오히려 훨씬 건전하고 좋은 건물이 될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이제 설계를 시작하는 학생이고, 벌써부터 그런 현실적인 설계만 한다면 앞으로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데 흥미를 유지하기가 어렵겠지. 일단 이런 자유로운 설계를 충분히 해봐야 나중에 현실성이 가미되더라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학생 때는 그런 말랑말랑하고 자유로운.. 그러니까 ‘컨셉’이 강조된 설계를 하는 거야.“


”네.. 그렇군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이 컨셉이라는 게 그런 어려운 말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니가 가져 온 그 컨셉을 보면.. 이 ‘통섭’이란 단어 말야. 이게 나 학생 때부터 유행하던 단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알고 있니?“

”네, 대충은 조사해봤는데.. 여러 가지 분야를 통합해서 새로운 뭔가 새로운 생각 같은 걸 도출하는..  그런 거라고 알고 있어요.“

”그럼 그걸 건축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음.. 그게..“


지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그런 어려운 말이나 개념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지. 기껏해야 중앙 마당이나 건물 사이의 공간들을 넓게 하는 식으로 해서 사람들이 어울리게 쉽게 한다.. 뭐 이런 식으로 구현을 해야 겠지.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건 그런 마당이나 사이 공간.. 그런 건축적 아이템 자체야. ‘내가 마당을 중점적으로 좋게 하고 싶다’ 혹은 ‘내가 사이 공간에 집중하겠다’는 생각이 있고, 그게 메스에서 바로 보여야 돼. 어려운 말의 나열로 보여지는 컨셉이 아니라, 니 메스 모형에서 그런 의지나 생각이 보자 마자 바로 보여야 되는 거야. 그게 컨셉이지.“

”네..“

”내가 지금 니 디자인 방향이 좋아졌다고 한 건, 그런 의지나 생각이 잘 읽히기 시작했기 때문에 좋아졌다고 하는거야. 확실히 저번보다 사람들의 흐름이 잘 유도되도록 바뀌었잖아. 이런 디자인 자체가 컨셉인거지. 그런 용어나 제목 같은 것은 그걸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역할에 불과한 거야. 다른 교수님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쨌든 내 생각은 그래.“


”네 알겠습니다. 아무튼 제목.. 컨셉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방향은 많이 좋아 졌으니까. 이제 다른 친구들처럼 조닝(대략적인 공간 구획) 정하고 평면짜고.. 해보자. 전체적인 진도가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거야.“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집에 돌아온 예린은 수현과 이야기를 나눈다.

”지수가 많이 좋아졌던데? 여보가 지난 시간에 많이 잡아줘서 그런가?“

”그런 것도 있지만.. 확실히 기본이 열심히 하는 친구라. 스스로 감을 좀 잡으니까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것 같더라구.“

”그러니까. 이제 좀 뭔가 방향이 잡혔어.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마감은 문안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까먹은 시간이 많아가지고..“

”열심히 하는 친구니까 어떻게든 해내지 않을까?“

”그래. 우리가 잘 봐주자.“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지났다. 디자인 개념을 보여주는 메스가 확정되면 조닝 정도로 구성되었던 평면 계획을 확정하고 단면 그리고 입면으로 계획이 진행된다. 도면들이 다 나오면 개념 구상을 다시 정리하고 최종 마감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가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시기인데, 설계수업의 최종 마감은 제출물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배치도, 평면도, 단면도, 입면도 등의 도면은 기본이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건물 모형,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과 디자인 의도를 보여주는 개념그림(다이어그램), 도면 등으로 구성된 거대한 패널까지 준비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퀄리티 높게 만들어 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설계실에서 밤을 새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이제 설계반 학생들에게 한 학기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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