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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Dec 03. 2023

잊혀진 가족

그 여름의 공모전 # 04




진성 백화점은 국내 최고의 백화점이다. 서울 종로구 한복판에 본점이 있고 판교 분당 일산 등 고급주거지마다 화려한 지점들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명품 매장이 입점해 있는 이 백화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즐긴다.


이 백화점은 창업주 최진무 회장이 70여년 전 아주 조그만 시장 잡화점에서 시작하여 맨주먹으로 여기까지 일으켜 낸 것이다. 이정수 회장은 업계의 신화로서 수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고 있다. 10여년 전 까지만 해도 직접 업무를 다 챙길만큼 정정했지만, 나이 80을 넘긴 시점부터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자식들에게 일을 다 물려주고 자신은 집에서 칩거하며 건강 관리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구순을 넘겨 이제 95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 생일을 맞아 많은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그의 집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그의 생일엔 성대한 식사 자리 같은 것이 없이 간단하게 그의 말 몇 마디를 듣고 그냥 헤어지는 식으로 조촐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지위나 업적, 카리스마 등을 생각하면 그의 생일에 모든 일가 친척이 모이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 올해는 아버지가 무슨 말씀이 있으시려나요?”

“글쎄. 작년처럼 진성 그룹 잘 관리해라. 경기 나빠진다는데 정신 똑바로 차려라.. 뭐 그런 정도 아닐까?”

“그러게요. 올해 실적이 더 나빠져서.. 저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골치가 아프네요.”

“암튼 들어가 보지 뭐. 무슨 말씀이 있으시겠지.”


최진무 회장의 방에 일가 친척이 다 모였다. 대략 30~40명 쯤 될 듯 하다. 다 모이니 상당히 북적북적하다. 다 모인 것을 확인한 후 첫째 아들이 입을 뗀다.


“아버지. 다 모였습니다. 올해 생신 축하드립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실까요?”

침대에 누워 먼 산을 바라보던 이 회장은 천천히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올해도 내 생일이 됐구만. 이제 갈 때도 됐는데 말이지.”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빨리 일어나셔서 진성 그룹 일 챙겨주셔야죠. 저희끼리 해내기가 벅찰 때가 많습니다.”

“구십이 넘은 노인네가 무슨 일을 한다고 그래. 이제 니들이 다 챙겨줘야지.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되기는 한다만은..”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버지. 올해도 다 모였습니다.”


첫째 아들이 친척들을 향해 눈짓을 하자,  다 같이 큰 목소리로 축하 인사를 올린다. 


“회장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래 오래 만수무강 하세요!”


40여명의 친척들이 한 목소리로 축하인사를 하자, 방 안이 쩌렁 쩌렁 울린다.


“그래, 그래.. 다들 고맙다.. 니들 봐서라도 내가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아버지 힘 내셔서 얼른 일어나셔야지요. 하실 말씀.. 당부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 이 회장은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는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첫째 아들 최정만 부회장은 생각했다.

‘왜 이렇게 말이 없으시지.. 올 해는 할 말이 없으신가. 이만 물러가겠다고 해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이 회장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정만아. 듣고 있냐?”

“네 잘 듣고 있습니다, 아버지.”

“난 90 평생을 거침없이 살아왔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이루고 싶은 것은 다 이루면서 살아왔어. 내가 하고자 하면 안되는 일이 없었다. 말 그대로 거리낄 게 없었지. 하지만 마음에 남는 게 딱 하나 있다.”

“그게 뭔가요 아버지.”

“...진희 이야기다.”


이제야 그 이야기를 꺼내시는군. 정만은 이제 그 이야기가 나올 시점이 됐구나 싶다.

“너도 기억하겠지만, 막내 진희가 내 마음의 큰 짐이다. 죽는 날까지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 같구나.”

“당연히 기억합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 때 진희를 그렇게 내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 땐 그냥 홧김에 진희를 다시는 안보겠다고 했던 것인데.. 그 애가 그렇게 가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도 진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구나.”

“...”


최진희는 최진무 회장의 막내딸이다. 50이 가까운 나이에 낳은 막내딸이라 이 회장은 진희를 각별히 아꼈다. 패션을 공부했던 진희는 파리로 유학길을 떠났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또 다른 한국 유학생을 만나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근본도 없는 가난뱅이 유학생을 최 회장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굴지의 재벌가에 진희를 시집보낼 계획을 모두 세워 놓았던 최 회장은 진희를 서울로 불러들여 노발 대발 화를 냈다.


“아빠! 나도 내 인생이 있어! 결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게 해달라고!”

“이 철없는 놈아.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 니가 니 홀몸인줄 알아! 너 결혼시키고 관계 맺는 것도 전부 진성 그룹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걸 알아야지! 그걸 왜 몰라!”

“내가 왜 아빠 회사를 위해 희생해야 하지? 나도 내 인생이라는 게 있어.. 난 죽어도 아빠가 결혼하라는 사람이랑 결혼 못해!”

“이놈이.. 이때까지 낳아주고 키워주고.. 모자란 것 하나 없이 다 해주니까 은혜도 모르고.. 뭐가 어쩌구 어째?”

“그래, 내가 아빠 덕분에 이렇게 호위 호식하며 산 거 알아. 다 안다구. 근데 내가 이거 다 해달라고 했어? 그냥 아빠가 다 해준 거잖아. 내가 아빠 딸로 태어난 죄로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해야 되냐고?”


거기까지 들은 최 회장의 분노가 폭발했다.

“뭐라고? 이 자식이! 야 너 나가. 당장 나가! 파리로 돌아가든지 그 자식한테 돌아가든지 맘대로 해. 이제 너 다시는 안볼테니까! 너 돈 보내던 것도 다 끊을테니 알아서 해! 호적에서 파든지 없는 자식 취급 할테니까! 당장 나가!”

“치, 나가라면 못 나갈 줄 아나. 나 그 사람이랑 결혼할꺼야, 그렇게 알아!”


그렇게 파리로 돌아간 진희는 그 유학생과 결혼을 해버렸다. 최 회장은 그 후로 진희와의 관계를 끊고 연락을 전혀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나서 그런 것이었지만, 그 다음엔 최 회장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것이 컸다.


‘진희 이놈, 그렇다고 나한테 전혀 연락을 안 하다니.. 잘 살고 있는 건가? 내 자존심이 있지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연락해볼 수도 없고.. 최소한 몇 년 더 있다가 알아보든지 해야지 뭐.’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결혼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던 진희가 몸이 급속히 안좋아 졌고, 오래지 않아 급기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아버님.. 진희가.. 진희가.. 죽었답니다..”

“뭐.. 뭐라고? 진희가 어떻게 됐다고?”


큰 충격을 받은 최 회장은 며칠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밥도 먹지 않았다. 그 충격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뒤로도 최 회장은 진희의 일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마음 속의 깊은 상처로 그냥 간직해둔 것이다. 그 후로 거의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최 회장은 이제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마무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만아, 진희가 딸을 낳았다고 했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이 있나?”

“아니요.. 그 뒤로 진희에 대해서 알아본 것이 없어서.. 남은 가족들이 어찌 되었는지 저희도 전혀 모릅니다.”

“그래.. 내가 좀 알아보라고 했어야 했는데.. 충격이 너무 커서 그저 잊어버리고만 싶었던 것 같다. 그 땐 그냥 진희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싶었어. 그래서 아무런 언급도, 조치도 하지 않았지. 그게 내 실수였던 것 같다.”

“그러면..”

“진희의 딸이나 남편..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봐라. 파리에 아직도 있는지 아니면 한국으로 다시 들어왔는지.. 들어왔다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면 어떻게 할까요?”

“글세.. 진성 그룹 가족으로 인정해서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겠지.. 아무튼 그 후에 일은 그 때 생각하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부터 빨리 알아봐라. 내 죽기 전에 그 애를 찾아봐야 겠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최 회장의 생일 모임은 끝이 났다. 자리를 나서며 둘째 아들 최정수가 최정만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아까 진희 가족.. 정확히 말하면 딸을 찾으시는 거야?”

“음.. 그래. 20년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잊지를 못하시는 거지.. 그게 도리에 맞기도 하고.‘

“소식 끊긴지가 20년인데.. 이제 와서 어디서 찾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요새 같은 정보화시대에 찾으려면 어딜 못 찾겠어. 안되면 사설 탐정이라도 써야지. 아버지 말씀대로 안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잖아?”


오늘은 지수 어머니의 제사가 있는 날이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일찍 돌아온 지수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선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가 마련해놓은 조촐한 제사상이 마련되어 있다. 생전에 엄마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아빠가 만든 빵과 미역국, 밥. 그리고 지수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이 올라와있다. 


제사를 마치고 지수와 아빠는 저녁을 먹는다.

“아빠, 엄마는 한국에서 뭘 하던 사람이었어?”

“전에 얘기 했잖아. 패션 공부를 하다가 파리로 왔던 유학생이라고..”

“근데 외할아버지고 외할머니고.. 엄마 가족들이랑 너무 연락도 없고 소통도 없어서.”

“엄마의 아빠, 엄마.. 그러니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었으니까 그런 거지. 그 얘기도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엄마 옛날 사진 같은 것도 거의 못 본 것 같고..”


이야기를 듣던 지수 아빠는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엄마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다 보니까 지수가 엄마가 많이 그리운가보구나. 아빠가 더 채워줬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빠가 대화의 화제를 바꿔본다.

“요새 학교 공부는 어때? 그 설계 수업이라는 건 계속 할 만 해? 맨날 집에도 안들어 오더니 말야.”

“뭐.. 그냥 저냥. 이번 학기 교수님들이 새로 오신 분들인데 괜찮은 거 같아.”

“그래, 이제 졸업도 얼마 안 남았는데.. 열심히 해봐.”


지수의 얼굴이 부담감으로 어두워진다. 안그래도 내년에 졸업하면 취업은 어찌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내일 수업부터 사이트(대지) 답사인데.. 이따 저녁에 친구들과 줌(zoom)으로 모여 조 분배를 하기로 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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